박영민 횡성소방서 방호구조과장

28년 전 일이다.대학 야구동아리에서 경기를 마친 뒤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차에 자리가 부족했다.농담반 진담반 내가 트렁크에 탈까 이야기를 꺼냈고 친구들은 신나게 웃으며 나를 트렁크에 태웠다.‘쾅’ 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비좁고 어두운 트렁크 속에서 예기치 못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은 차를 출발시켰고 나는 트렁크 안에서 주먹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드리며 온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절규했다.

그 후로 나는 긴 터널 안을 지나거나 비행기를 탈 때,심지어 군대 훈련소에서 화생방 교육을 받지 못할 정도로 밀폐된 곳에서 어김없이 올라오는 공포를 느끼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나중에서야 이것이 ‘폐소공포증’이라는 일종의 공황장애라는 것을 알게됐고,초기 치료 골든타임을 놓친 후 25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해결방법을 스스로 찾게 됐다.그날 사고를 계기로 나는 내 문제 해결에 만족하지 않고 참혹한 재난현장에서 각종 사고 장면을 목격하고 처리하는 과정 속에 육체적,정신적 아픔을 겪는 동료들을 생각하게 됐다.그들의 행복을 위해 앞으로 나의 삶을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이것이 어찌 소방공무원들만의 문제이겠는가.호스피스 봉사,북한이탈주민과의 만남,청소년 교사활동 등을 통해 많은 분들이 마음의 아픔들을 안고 있음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내가 선택한 길이 시대적 소명이라 생각하고 심리상담사,가정상담사,외상 후 스트레스 상담사 자격증 3가지를 취득했다.직원상담은 물론 화재피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화재예방교육과 재난심리치료까지 연계하는 ‘화재야 안녕’이라는 특수시책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 소방관들은 119 전화 한통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쉼 없이 재난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오늘은 지옥같은 지하건물의 어둠속에서 화마와 싸우고,내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참혹한 사고현장에 간다.그 다음날은 또 어떤 현장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에 소방관들은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소방관은 슈퍼맨이 아니다.평범한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빠,아들이다.우리 소방관들의 무너진 마음은 누가 보살펴 줄 것인가?아무리 유능한 심리상담 전문가들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결국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동료 소방관들이 문제해결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현장 출동으로 장애를 갖게 된 직원과 상담하던 중 “저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파요”하고 글썽이던 모습이 생생하다.나의 지난 날 아픔이 ‘외상 후 성장’이라는 값진 선물로 돌아왔듯,고통받는 동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에 소명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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