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섭 시인
▲ 김종섭 시인
세상은 풍요롭고 고요하다.움직임에 따라 풍요와 고요가 그 세상 밖으로 나와 허망하게 깨져간다.삶은 정의할 수 없는 것임에는 틀림없다.분명한 것은 이것이 욕심의 부활 때문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지금 이대로의 삶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멈추거나 머물지 않은 채 끊임 없이 또 다른 만족의 기대치를 새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욕심이라는 병명을 가지고 불치병을 안고 살아간다.가끔은 차라리 배부른 돼지가 되어보자.배만 채우면 최상의 행복.그 한계점에 서 보자.

비교적 단순한 듯하면서 어려운 일이긴 하다. 단순해 질수록 생각이 깊어만 간다.먹기 위해 사는가,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닭이 먼저냐,알이 먼저냐’ 하는 것과 유사한 혼돈스러운 질문이다.

결국은 삶의 이유에 관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해답을 얻어가려 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모순은 생겨났다.이같은 질문의 요지는 동전의 양면성을 닮았다.

우리 인생 곳곳에는 한꺼번에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요행수가 깔려 있다. 윷판의 풍경을 인용해 ‘도 아니면 모’라는 말을 자주 말 끝에 올려 놓는다. 확률은 ‘50대 50’이다.갈 때까지 이미 가 버린 안일하고 위험한 발상이다.한탕주의에 매몰된 어리석음일 수도 있다.

아쉽게도 이러한 생각의 발상은 사실이다.경기가 안 좋을수록 복권 판매량이 증가한다고 한다.꿈을 한탕주의에 결부시킨 사례다.물론 살아가는 방식에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각자의 명분이 갖는 가치들은 서로 별반 다를 것 없다. 다만 개개인의 포장술에 따라 가치의 눈 높이가 달라질 뿐이다.

시름에 빠져 세상을 비관적으로 살아가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행복권을 누려야 할 세상에 고난이 주어진 것이다.흐렸다가도 맑아지는 날이 있듯이 그런 고난이 와도 우발적인 날씨 변화의 차이 정도로 보아 주면 될 듯 싶다.

분명 삶의 법칙은 있다.주어진 여건과 현실 사이에 놓인 실천을 지켜가는 일 일 것이다.실천은 진실하다.그리고 그 실천의 시작은 역행의 연습 과정이다.채워 넣기 보다는 비워가는 연습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번뇌가 소멸된 상태 또는 완성된 깨달음의 세계가 존재하는 불교 교리”.‘열반’의 뜻이다.세상을 사는 우리네 가슴은 이같은 깨달음의 열반,그 뜻을 같이 품어가야 한다.

우선의 목표는 자신을 되돌아 보는 일인 듯하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는 시작보다 자신을 스스로 먼저 알아가는 그 시작점에 ‘삶의 법칙’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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