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 제복 벗고 고무직공으로’ 일제·노동 착취에 맞선 여걸
철원 동송 출신·반일활동으로 옥고 치른 노동운동가
공장노동자·고학생으로 노동운동·여성운동 펼쳐
‘여교 제복 벗고 고무직공으로 동지 획득’ 신문보도
1933년 철원독서반 사건으로 일제경찰에 끌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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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소설 ‘홍길동전’ 저자인 강원의 인물 허균(1569∼1618)과 한자이름까지 같은 사람 여럿이 일제강점기에 살았다.1909년 충남 출생 허균은 공업학교를 나와 제지회사를 만들고, 1919년 평북 창성 출생 허균은 대구의학전문학교를 나왔다.1921년에는 평양에서 곡물상을 하는 허균이 있었다.강원도를 본적으로 둔 허균은 2명 있다.인제가 본적인 1891년생 허균은 경기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나와 1913년부터 충남지역 농업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퇴직 후 1938년 친일단체 대동일진회 임원으로 가담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또 다른 강원인 허균은 1904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452 출신이다.여러 허균 중 유일한 여성이다.1930년대 비밀리에 반제국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을 지속하다가 일제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활동 도중 일제경찰에 여러 번 끌려갔으며 징역형의 시련을 겪었다.일제강점기에 살면서 사회적 현실에 저항한 여성 허균의 활동은 적서차별의 조선사회 모순을 고발한 허균의 이미지와 맞닿아 강렬한 인상을 준다.

허균은 본명 이외에 일제경찰 감시를 피해 여러 이름을 썼다.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아 허마리아로 불렸다.허정균,허정옥,노봉익,노봉희 등의 가명도 사용했다.허균은 1922년 충남 당진의 천주교 운영 매괴학교를 나와 송악 양잠전습소에 들어가 양잠교사 면허를 얻은 뒤 경기 연천,춘천원잠종소,철원 묘장과 동송 등지에서 일했다.1929년 4월에는 서울의 ‘경성고학당’ 고등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여성운동,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단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를 비롯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 중앙청년연맹 등에서 임원으로 활동한다.

당시 발행된 중외일보에는 허균의 사회운동단체 활동 사실이 여러번 기사화됐다.1930년 4월 15일 여성노동자들이 밀집되어있는 동대문 외곽지역을 중심으로 근우회 경동지회가 창립되자 집행위원이자 서무부장을 맡는다.(1930년 4월 19일자) 6월 31일과 7월 1일 서울 중앙청년동맹 북구지부 회의에서는 집행위원 겸 선전조직부 부원으로 참여한다.(1930년 7월 2?4일자) 이어 9월에는 향학열에 불타는 가난한 여학생들간에 서로 도와주자는 취지로 설립된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돼 회관 건립문제 등을 논의했다.(1930년 9월 18일자)


식민체제 저항 활동에 나선 허균은 1930년 무렵부터 일제경찰에 끌려갔다가 풀려나는 일이 반복됐다.고향 철원과 충남 홍성,서울에서 경찰에 끌려갈 때마다 관련 내용이 신문기사로 실렸다.1930년 충남 홍성을 방문했다가 경찰에 끌려간 사실이 1930년 8월 7일자 중외일보에 ‘충남 홍성경찰서에서는 서울고학당에 있는 허균 양을 검거했는데 사건 내용은 절대 비밀이라더라’라고 보도되고 있다.1932년 11월에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갔다가 풀려났다.1933년 5월에는 철원지역에서 독서활동을 통해 반일의식을 돋워온 철원독서반이 발각돼 여러 사회운동가들이 체포될 때도 붙잡혔다.신설동 서울고무공장에서 일하던 허균은 철원청년동맹 박용준,김순만,정의식 등과 교류하면서 청년동맹회관에서 청소년들을 불러모아 사회적 모순을 일깨우는 책을 읽게 하고,직접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하며 의기를 돋운 것.철원에서 함께 활동한 박용준,김순만 등은 1930년 광주학생운동을 알리는 선전문을 철원읍내에 뿌리는 등 항일의식이 남달랐다.허균은 이들과 함께 경찰에 끌려가 6개월여 취조를 받다가 불기소로 풀려난 사실이 조선중앙일보 1933년 6월 1일자에 ‘6명은 석방코 4명 검사국 송치,경찰 취조 6개월간 철원독서반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허균은 2년여 뒤에 서울 동대문,용산 일원에서 전개된 공장 파업과 노동조합 설립 추진 관련해 또다시 체포된다.서울고무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여성노동자,사회운동가들과 함께 비밀리에 노동조합 설립을 추진하는 등 반일 대중투쟁을 벌이다가 경찰에 끌려가 취조당했다.1935년 8월 24일자로 발행된 동아일보 호외에는 재판을 앞두고 있는 허균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여교 제복 벗고 고무직공으로 직접 동지 획득, 공장반 조직’ 제목의 기사는 아래와 같다.

이 사건에 연좌한 인물 중 특히 허마리아는 일찍 근우회와 중앙청맹에 투신하여 포면적 합법운동에 종사하면서 시내 고학당 학생으로 공부하던 것을 단연히 버리고,비합법운동을 실천하고자 스스로 고무직공이 되어 시내 각 고무공장으로 다니면서 직장에서 직접 동지 획득에 노력 중 권영태 등과 악수하게 됨에 이르러 일층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여 이번 사건에 각 공장반을 결성하게 하였다.허균은 이 신문기사가 실린지 넉 달 후인 1935년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에도 공장노동자로 일하며 광복을 맞은 허균은 잡지 ‘여성공론’ 창간호(1946년 1월 발행)의 기획좌담회 ‘근로여성의 당면임무’에 참석하고,기고 ‘나의 지나온 생활’을 발표했다.일제말기 더 극악한 횡포로 처참해진 공장노동자의 상황과 노동운동가로 거듭나게 된 면모를 엿볼 수 있다.‘매일 꿋꿋이 20전씩 주는 돈을 바라고 단잠을 못자고 다섯시면 전기가 통해있는 듯이 공장으로 발을 들여놔야한다.길은 참으로 멀다.손발은 고드름같이 얼어 남의 살같고 입술은 죽은 사람같이 시퍼렇고 눈썹은 입김에 서려서 서리발이 하얗게 붙어있다.이때 공장에 허덕이면서 가니 뜨뜻한 물 한모금 없다.발 손이 시려워서 어린 동무들은 울기까지 한다.이때 나는 생각한다.(중략)아 언제나 원수를 갚고 말겠다고.종일 분함을 이기지 못하다가 게다가 황국신민서사까지 읽으라고 하니 더한층 분함은 치밀어 올라와 가슴이 탁 막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온다.’

광복되던 해 41세가 된 허균은 노동자 인권을 대변해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집행위원 및 부인부 책임자로 활동하는 등 노동운동에 또다시 투신했다.1946년 8월30일자 ‘전국노동자신문’에 ‘부인 노동자의 요구’라는 기고문을 실어 한국여성에게 해방의 혜택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산전산후 휴가,생리일에 가제와 솜버선,휴식 제공,노동하면서 발병된 부인병 치료 등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확보를 주장했다.일제경찰이 작성한 감시대상인물카드에 수형번호 ‘1122’를 단 상반신 사진이 남아있어 반듯한 여성 허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본지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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