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하룻밤 같은 인생의 저물녘, 4월의 숲을 생각하다
흔히 사람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고 한다.내게 묻는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닮고 싶은가?’
아무래도 난 숲,
그것도 ‘4월의 숲’을 닮고 싶다.

세익스피어도 가는 세월의 빠름과 그 무의미에 어지간히 우두망찰했었나 보다. “인생이란 숫자 1(one)을 셀 때의 속도”(『햄릿』제 5장 2막이던가)라고 하고, 『맥베스』에서는 맥베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독백을 한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 무대 위에서 자기가 맡은 시간 동안 흥을 내고 안달하다 그것이 지나면 잊혀지는 불쌍한 배우에 불과하다. 그것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처럼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맞는 말이다. 정말이지 시간이란 뜬귀신 자리 옮기듯 빠르기는 빠르다. “인생은 낯선 여관에서의 하룻밤 같다.”며 눈을 감은 테레사 수녀의 말뜻, 그 속절없음과 정처없음에 공감한다. 한 번 흘러간 강물엔 두 번 다시 손을 담글 수 없는 것이 인간사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던가.
 

▲ 이광택 작 ‘진달래 모임’
▲ 이광택 작 ‘진달래 모임’

그렇다고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라며 한탄만 하고 있을 수 없는 게 또 우리네 인생이다. 제 아무리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사라지지 않을 기억들을 남기고 갈 수 있는 것 또한 우리들에게 남겨진 몫이 아닌가. 예술가의 허울을 쓰고 나왔으니 나 같은 화가야 세상에 감춰진 미의 씨앗을 발견하여 그것으로 예술의 꽃을 피우고 문화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게 업보라면 업보이겠다. 반 고호도 얘기하지 않았는가. “종교는 사라지지만 신은 남는다”고. 예술가는 사라지지만 예술(작품)은 그렇게 남게 되는 것이겠다. ‘창공에 뜬 갈매기’같이 실속 없고 소용이 없는 존재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중국의 문호 루쉰이 남긴 이 말을 오랜 동안 음미하곤 했다. 저물녘 허리띠처럼 휜 시골길을 바라보는 심경이 그런 것일까. 이 말을 나직이 읊조리면 마치 입 안에서 저녁 시골 교회의 맑은 종소리가, 아니면 마을 곁의 작은 절에서 울리는 풍경(風磬)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떤 상황에 즉각즉각 대응하지 말고, 느긋하고 누긋하게 생각을 가다듬은 연후에 매듭을 지라’는 뜻도 좀 좋은가. “제비처럼 빠르고 참새처럼 민첩하게!”를 크게 외치는 이 새털처럼 가벼운 시대에 얼마나 유용한 말인가.

우스갯말로 ‘먹고사니즘(먹고 사는 데 몰두해야 하는 생존 우선주의)’에서 아직도 허덕이는, 가련한 화가의 삶이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이 살았다. 부디 남은 생을 온전히 내 뜻에 따라 살고 삶의 본질적인 면을 더 깊게 바라보면 좋겠다. 음미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흔히 사람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고 한다. 내게 묻는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닮고 싶은가?’

아무래도 난 숲, 그것도‘ 4월의 숲’을 닮고 싶다. 이유는 삶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숲을, 그 중 생명을 움 틔우는 4월의 숲을 무엇보다 사랑할 테니까. 나이 육십에 햇볕 다냥한 마당에 발 개고 앉아 이런 시구도 중얼거리면 살아있음의 감사를 더욱 깊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임 날 기다리는 듯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덮고

머언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이런가

-박화목 시인의 ‘망향’ 중에서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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