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우리는 지금 무엇에 열광하는가? 중앙 정치권은 '패러디'에 열광하고, 그 열광을 또 다시 열광하고. 또는 신행정수도에 열광하고 또 다시 그 열광에 열광하고. 대중은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 열광하고, 그 열광에 또 열광하고. 그러므로 다시 묻는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열광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에 열광하는가
 그 대답을 얻기 위해 잠시 지구 반대편 칠레로 건너가 보자. 그들은 지금 무엇에 열광하고 있는가? 칠레 사람들은 지금 한 죽은 시인에 열광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1971년에 노벨 문학상을 탄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다. 대통령부터 가난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네루다 탄생 100 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칠레 전 국토를 축하 분위기로 물들이고 있다. 어째서인가? 그 답은 행사장에서 찾을 수 있다. 시 낭송회에서 한 어린 여성이 네루다의 민중시를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낭송한다. 모인 군중들 속엔 피노체트 쿠데타 때 학살된 정치범 가족들도 있다. 알겠는가? 네루다가 소외된 이들의 한을 어루만지는 시를 써 이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아니, 뚜렷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열광하는가?
 탄생 100 주년? 그렇다면 독일로 건너가 보자. 독일 뮌헨은 지난 99년에 한 작가의 탄생 100 주년 추모 열기로 들떠 있었다. 전시회와 강연회에 많은 독일인들이 모여 들었다. 누구이기에? 그의 이름은 이미륵(본명 이의경, 아명 미륵·1899∼1950)이다. '압록강은 흐른다'를 써 독일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한국인 작가 말이다. "카프카에 견줄 만큼 빼어난 문장"이라며 독일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이미 이미륵에 열중했으며, 죽은 뒤 추모협회를 만드는 등 여전히 이미륵이 그려낸 동양의 내면 풍경과 대면하는 기회를 즐기고 있다. 다시 말한다. 독일 뮌헨 사람들은 그 해에 이미륵에 열광하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에 열광했는가?
 이번엔 중국으로 건너가 보자.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탄생 100 주년이 되는 올해에 '붉은 경전(紅色經典)' 출판이 붐을 이루고 있다. 중국인들은 지금 '붉은 경전' 중 특히 덩샤오핑의 전기와 이론서를 주로 읽는다.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마오(毛)의 중국이 스탈린적 국가자본주의로 평가 절하되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치달은 덩(鄧)의 시책 역시 세계 시장에 편입된 개방적 국가자본주의 노선으로 가고 말았다는 비판을 받지만, 어디 세상에 트로츠키주의자들뿐이겠는가.
  덩샤오핑의 '홍색경전'
 중국은 지금 어찌됐든, 서구의 자본가 역할을 국가가 대신하되 노동자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체제인 국가자본주의로 가든 말든, 엄청난 국가 발전을 환상처럼 이루어내는 중이다. 오늘의 중국인들이 어찌 "현재의 세계는 개방의 세계다(現在的世界是開放的世界)."라며 개혁·개방 가속화 이론을 들고 나온 덩샤오핑을 숭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북경은 지금 덩샤오핑의 '붉은 경전'에 열광 중이다.
 우리는 무엇에 열광하고 있는가? 시인인가, 작가인가, 아니면 위대한 정치가인가? 그들처럼 속 깊으며, 그들처럼 격조 있으며, 그들처럼 역사적인가? 그네들처럼 이념적인가, 그네들처럼 철학적인가, 그네들처럼 성찰적인가? 100 주년은 그저 하나의 예일 따름이다. 우리는 시간을 잊고, 역사를 잊고, 전통을 잊을 뿐이다. 다만 한 때의 '풍(風)'에 이리 몰리고, 다만 하나의 '룩(Look)'에 저리 쏠릴 따름이다. 이 천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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