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한과 예술경지 승화 '외길 인생'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이 땅의 음식문화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지녔던 것 같다. 그는 조선 8도 각 고을의 독특한 음식을 조사하고 각지의 어육 채소 과일 등 특산물과 조리법을 기록해 도문대작(屠門大嚼)이란 저서를 남겼다. 이 책에 유밀과(油蜜果)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상세하게 나오는데 제사와 잔치 손님대접에 빼놓을 수 없는 조과(造果)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고 했다. 유밀과의 주종을 이루는 산자(散子)가 곧 지금의 한과를 대표하는 과줄이다. 허균의 유밀과 얘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전통 과자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백년 맥을 이어온 우리 과자 한과에 평생 매달려온 최봉석(崔鳳錫·63)씨, 그는 정부가 인정한 전통식품 명인 제 23호로 강릉 한과마을 사천에서 부인 김주희(53)씨와 함께 한과를 만들고 있다.

한과맛 뛰어났던 작은할머니 도우며 기술 익혀
전과정 수작업 철저한 주문생산으로 품질 유지
2000년 전통식품 명인 지정…체험관 건립 소망


 최봉석씨는 16대째 사천 땅 노동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강릉 토박이다. 20대였던 60년대 초 보릿고개의 허기를 이겨보려고 무작정 상경해서 1년 남짓 막일을 한 것 외엔 고향 땅을 떠나본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농사짓는 일 빼놓고 보고 배운 게 한과 만들기였습니다. 작은 댁 할머니(이원섭, 작고)께서 만드는 한과는 동네 안팎에 소문이 날 정도로 맛이 좋았죠. 할머니 곁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뒷일을 거들면서 한과 만드는 전 과정을 익혔습니다. 집집마다 제사음식 잔치음식으로 만들던 한과가 어느 틈에 상품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가까운 주문진에서 한과를 많이 찾았어요. 처음엔 사천 사람들이 땔나무 곡식을 짊어지고 주문진에 가서 명태 오징어 같은 생선을 바꿔왔는데 사천 한과 맛을 아는 주문진 사람들이 한과를 찾기 시작한 겁니다. 제사상 잔칫상 고사상에 오르는 한과가 바닷가 사람들 주전부리 감으로 인기를 모은 것이다. 하지만 쌀이 귀해 쌀로 술빚은 일과 한과 만드는 일을 정부가 통제하던 시절이라 사천 사람들은 밤에 한과를 주문진으로 운반했다.
 강릉사람들은 제사상 잔칫상에 한과를 빼놓지 않는다. 특히 결혼식 음식으로 한과는 필수적이다. 간단히 말하면 말린 찰떡을 키워서 일군 과자가 한과입니다. 부풀린 과자란 뜻이다. 신랑 신부가 합심해서 살림을 일구고 재산을 늘려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한과를 결혼식 음식상에 올린다. 풍성한 것을 좋아하는 강릉사람들이라 잔칫상 제사상 고사상에 한과를 높이 쌓아 올렸다. 하지만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잔손이 많이 가는 한과를 큰일 때마다 집에서 만들어 쓰기가 어렵다. 대대로 이어 내려온 사천 땅 한과가 시장을 만난 것이다.
 한과는 겉보기에 촌스럽고 투박하다.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울퉁불퉁한데다 손으로 집어들 때 촉감도 거칠다. 하지만 산자를 한입 베어 물거나 작은 강정을 통째로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보면 어느새 스르르 녹으면서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혀에서 목구멍으로 전해진다. 어린애들이나 이가 성치 않은 노인들도 잇몸과 입천장으로 지그시 눌러 녹여서 맛을 즐길 수 있는 과자다. 매끄럽고 맛이 진한 양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은은한 맛, 먹어보지 않고는 상상 할 수 없는 맛을 지닌 과자가 한과다. 게다가 물맑고 공기 좋은 사천 땅에서 생산된 찹쌀 멥쌀 참깨 들깨를 써서 만들어내니 안전하고 순수한 국산 가공식품이다.
 생산량으로 보면 경남 합천 한과가 위지만 맛으로 치면 우리 강릉 사천 한과가 으뜸입니다. 대부분의 조리과정에서 기계를 쓰지 않고 수작업에 의존하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음식 맛은 손끝에서 나오는 법이라 찰떡을 말리는 과정에서 시간 맞춰가며 일일이 손으로 뒤집는 일을 하죠. 수십 수백번의 잔손이 가야 한과의 제 맛이 납니다. 쌀을 담가 불리고 빻고 반죽해서 떡을 만든 후에 일정한 모양으로 썰어서 말리는데 그 많은 떡 조각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뒤집는 과정은 그야말로 정성이다. 그 떡조각들을 기름 발라 부풀리고 고물을 입혀 내놓다보면 며칠씩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기계화 분업화 규격화가 어려운 한과 조리과정 때문에 늘 일손이 달린다.
 사천한과의 명성이 높아지고 마을 집집마다 본격 생산을 시작하면서 사천 땅 노동리는 저절로 한과마을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서울의 백화점과 유명 마트에 한과를 공급하기 위해 최봉석씨는 상표를 개발하고 공동포장 공동출하를 통해 판로를 넓히는 일에 앞장섰다. 집집마다 각기 식품제조 허가를 받아 생산하다보니 선의의 경쟁도 생기고 공동으로 판로를 개척하는데 힘을 합치기도 했습니다. 홍보비용 유통비용을 줄이기 위해 공동브랜드를 만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의견 차이가 커서 그만두었죠. 그 대신 자치단체와 농협 등 유관기관의 협조 지원을 이끌어내는 일이나 서울 시장 개척을 위해 마을을 대표해 뛰어다녔습니다.
 한과의 품질을 높이고 상품성을 확보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한과에 관한 한 백과사전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강릉갈골산자’라는 독자 브랜드를 만들어 한과 품질과 포장 판매에 차별화를 시도했다.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제조과정을 통해 생산하는 한과라 집집마다 맛과 품질이 비슷합니다. 차별화라지만 사실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그래도 그 약간의 차이로 소비자가 다시 찾는 한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전통 재래식 한과 제조방식을 고수하면서도 맛과 품질의 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그는 지난 2000년 정부로부터 전통식품 명인 제23호의 지정을 받았다. 명인 지정을 받을 땐 욕심도 생기고 꿈도 컸지만 막상 한과 명인이란 인정을 받고나니 조심성이 더 커졌습니다. 소비자들은 맛을 기막히게 기억합니다. 우리 집에서 만든 한과가 조금이라도 부실해지면 소비자들이 금방 외면합니다. 명인이 만든 한과의 맛과 품질이 겨우 이것밖에 안되느냐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아내와 저는 밤잠을 설쳐가며 정성을 쏟습니다.
 한과 만들기에 평생을 바친 그는 정부가 주는 산업포장도 받았고 강원도농어민대상도 받았다. 강릉갈골산자가 정부지정 전통식품업체로 성장했고 ISO 9002 인증도 받았다. 한과 만들기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에게 주어진 영광스런 보상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우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백화점 납품도 끊고 유통업체에 물건도 대지 않으면서 철저한 주문생산 체제로 바꿨다. 수입은 좀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더 큰 보람을 느낍니다. 나와 내 아내가 만드는 한과의 품질과 맛을 인정해서 꾸준히 찾아주는 소비자들이 있다는 게 돈버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그동안 한과를 만들어 번 돈으로 자식들 키우고 교육시켜 사회에 내보냈으니 이젠 한과를 우리의 우수한 전통식품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과마을 사천에 한과 체험관을 세우는 큰 일을 구상하고 있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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