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식 논설위원

 좀 시간이 지난 사안이긴 하지만, 대학내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문제이기에, 또 특히 최근 한 교수가 본지에 기고한 바도 있었기에 다시 거론해본다. 한국인만큼 '무릎 꿇기' 문제에 관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어디 또 있을까. 아니다, 이보다 먼저 살펴야 할 것은 '무릎 꿇기'를 아름다운 행위로 봐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다. 혹자는 이를 두고 다만 상황적 문제일 따름이라 주장할지 모른다. 부모 앞에 무릎 꿇는 것, 신하가 궁궐 계단 아래 무릎 꿇는 행위야말로 존경과 충성을 보이는 것이라 문제될 것 없다는 이해의 수준에서 말이다.
 그러나 '무릎 꿇기'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담겨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 부인배(夫人拜) 항을 보자. 글은 "궤는 무릎이 땅에 닿는 것이고, 배수(拜手)는 손이 땅에 닿는 것이며, 계수(稽首)는 머리가 땅에 닿는 것이다. 그런데 부인이 숙배(肅拜)할 때에 머리를 구부리지 않으니, 정히 고례(古禮)가 아니다"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단 무릎을 꿇게 되면 대체로 손을 땅에 짚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머리를 구부리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머리를 구부렸는데 무슨 예가 아니라며 따지려드느냐 하는 얘기다. 따라서 문제 삼을 것은 이게 아니라 '시경'의 다음 말이다. '시경'은 이른다. "꺾지도 말고 구부리지도 말라(勿剪勿拜)." 이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궤배 즉,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짚는 것은 결국 굴복이요 굴종이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무릎 꿇기'를 아름답게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자. 한국인만큼 '무릎 꿇기'에 뼈아픈 역사를 지닌 민족도 없으리라. 조선 인조 14년(1636년) 섣달, 청 태종 10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다. 최명길 등 주화파의 의견에 따라 인조는 항복의 길을 택해 다음해 정월, 세자 대신 등 500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태종에게 이마가 땅에 닿는 절을 아홉 번이나 하며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갖춘다. 병자호란의 끝 장면이다.
 이마가 땅에 닿는 절을 하기 위해 아홉 번이나 무릎을 꿇을 때에 인조의 심정이 어떠했으며, 그는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회고해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릴 이 치욕을 인조는 복수의 일념으로 참아냈을 것 같다. 형 봉림대군과 세자 소현을 인질로 심양(瀋陽)에 보내면서 또 그렇게 어금니를 물었을 것이다.
 주제로 넘어가 보자. 강원대학교 최현섭 총장은 그 때,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릎을 꿇으며 대학 통합 유보를 요구하는 학생들 앞에서 그들과 똑같이 무릎을 꿇을 때, 최 총장은 오늘의 안타까운 대학 현실을 통탄하면서, 동시에 당국의 재정 지원 배제 원칙에 엄청난 심적 부담을 느끼면서, 그리하여 대학 통합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면서, 그걸 스스로의 철학으로 굳혀 가면서, 그야말로 충심 어린 심정으로 젊은 제자, 어린 후배들에게 호소하는 심정 바로 그것이었을 듯싶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우리 사신이 황제를 만났을 때, 무릎을 꿇었으나 뒤를 붙이고 앉지 않았다" 했으되, 최 총장은 기꺼이 뒤를 붙이고 제자들에게 다가앉아 논리적 승복과 함께 정서적 충정을 이해시키려 적지 않은 애를 썼던 것이다.
 이걸 놓고 몇 주 지난 지금까지 여러 자리에서 사람들이 갖가지 얘기를 하는 까닭은 '무릎 꿇기'가 예사로운 행위가 아니라는 가치론적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번 따져보자. 예의 삼전도의 비애에서 보듯 '무릎 꿇기'만큼 정치적 상징성을 가진 몸짓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행위는 명백한 패배의 인정이다. 나이브하게 말하자면, 무릎 꿇는 행위는 완전한 '서열 규정' 행위다. 부모나 스승 앞이든 또는 권력 앞이든 서열과 질서를 분명히 한다는 승복의 행위요 권위에 대한 복종의 기호다.
 그러므로 제자 앞에 무릎 꿇은 최현섭 총장의 행위는 그 충정을 이해 못할 바 아니나, 매우 서글픈 반(反)권위, 반(反)질서, 비(非)교육의 정치 상징적 위험한 행동이었다. 일부 숙연한 느낌을 준다지만, 그만큼 대학의 지적 척박성과 교육계의 무정부주의적 현실, 곧 우리 교육 현장이 지금 무기력한 패닉 상태임을 보여주는 인상 깊은 그러나 매우 쓸쓸한 장면이었다는 것이다. 저 삼전도의 경우처럼 말이다.
 이 잊지 못할 장면을 보고 많은 사람은 질문한다. 시세에 굴종하여 최 총장은 주마가편하듯 지나치게 앞서 실적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가? 저 곤외의 흐름에 무릎 꿇어 대학 문화의 창의적 담론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닌가?
이광식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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