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 영동본부 취재부장

 기자는 지난 2001년 일본 수산 고교생 십수명이 하와이 주변 해역에서 실습중에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난을 통해 소회를 피력한 적이 있다.
 참사 소식은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수산업의 미래를 짊어질 10대 고교생들을 그 먼 하와이까지 선상 실습을 보내는 그들의 바다 경영 의식에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년뒤 요즘 기자는 중국 어선이 북한 동해수역에서 '싹쓸이' 조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다시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하고있다. 지난달 17일 처음 목격된 이후 지금까지 NLL(북방 한계선)을 넘어 북한 어장으로 진입한 중국 어선들은 지금까지 750척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성어기인 10월까지 얼마나 더 많은 중국 어선이 북한 어장에 들어갈지 가늠키 어렵다는 수산업계의 전망도 나오고 있어 착잡하기 이를데 없다. 이들 중국 어선들은 척당 t수가 130∼300여t급 대형 어선인데다 주로 쌍끌이 저인망과 트롤 등 어획강도가 높은 선단으로 편성돼있다.
 도내에 4000여척의 어선이 있다고해도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20t 이상은 120척에 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 북한어장에 들어간 중국 어선이 얼마나 큰 세력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동해안 어업인들은 그들이 오징어 명태 등의 회유 길목에서 씨를 말린다고 발을 구르고 있다. 올해는 그나마 오징어가 많이 나 다행이지만, 그대로두면 정말 큰일 이라는 위기 의식이 팽배하다.
 다시 처음 시작했던 일본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일본의 도쿄도 남쪽 태평양 상에는 '오가사와라(小笠原)'라는 제도(諸島)가 있다. 1884년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이 암살 저격위험에 시달리자 골치아파진 일본 정부가 그를 유배시킨 섬이기에 크게 낯설지 않다.
 그런데 그 거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려 1000㎞. 김옥균 유배 당시에도 무려 21일을 파도와 싸워야하는 고행길이었다. 이런 절해고도, 무인도를 일본인들이 1593년에 발견, 최초 탐사자 '오가사와라 사타요리'의 이름을 따서 팻말을 꽂았다. 해저 화산이 융기해 만들어진뒤 한번도 대륙과 연결된 적이 없었던 섬은 이로써 일본 영토로 편입돼 지금은 훼리선이 다니는 국립공원이 됐다.
 이처럼 바다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 대신 도전하는 자에게는 참으로 많은 역사를 만들어줬다. 굳이 물의 도시 베네치아나 제노바,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때 기병을 앞세워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평정하고, 동∼서 교류의 물꼬를 활짝 열었던 몽골도 '팍스 몽골리카'가 완성된 뒤에는 해로를 이용한 대량 운반의 효율성과 경제성에 눈을 뜨고 해상 교역을 크게 장려했다.
 중국 명(明)대에 무려 7차례 18만5000㎞ 대항해를 통해 콜럼버스보다 70년 앞서 바다를 지배했던 정화(鄭和)의 항해도 원(元)대의 이같은 해상 교역 기반에서 출발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도 이사부나 장보고, 이순신, 안용복 처럼 일찍이 바다에 눈을 뜬 선각자들이 적지 않았고 가깝게는 지난 98년 동해항에서 금강산 뱃길을 열면서 냉전의 바다를 화해의 바다로 바꾸는 기쁨을 맛봤다.
 그런데 그 바다에서 지금 중국 어선들이 활개를 치고있다. 지난해 이맘때 144척이 처음 목격되더니 올해는 아예 한 나라의 어선단을 방불케하는 중국 어선이 북녘의 바다를 휘젓고 있다.
 지난 1년간 외교 경로를 총동원 해서라도 중국 어선 제재책을 강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제는 7월중에 예정된 남북수산회담에 기대를 걸어볼 수 밖에 없다. 남북의 수산 실무자들이 머리를 맞대는 자리에서 중국 어선들을 몰아내고 도내 어선들이 북녘의 바다에 입어, 남북이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길이 열려야 한다. 그렇게 될때 바다는 도전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선물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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