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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겨울 입새에 접어든 농촌들녘이 을씨년스럽다. 풍년을 노래하고 흥청 해야 될 농업인들이 차가운 아스팔트위에서 온몸으로 울부짖고 있다. 더욱이 ‘쌀 협상 국회 비준 저지 추곡 수매제 부활’을 위해 쌀을 쌓아놓고 시위를 벌이는 소위 벼 1000만석 야적투쟁을 벌이고 있다. 왜일까.
 우리 속담에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農夫餓死 枕厥種子)'는 말이 있다. 그만큼 우리 한민족은 곡식 특히 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쌀은 우리 농촌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식량안보의 중핵이다. 그러나 쌀 협상 국회비준을 앞둔 현재 쌀값이 폭락하고 농협에서 매입하는 물량이 부족 쌀대란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농업인들이 거리로 뛰쳐 나오고 아우성치는 것은 농촌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국회 비준 저지를 위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단식투쟁하고 있는 농업인 출신 강기갑 국회의원의 몸짓을 보았다. 그것이 바로 농촌 현실이다. 쌀 개방은 90년대 초반부터 예상됐고 93년 UR협상이후 정부가 천문학적 예산을 농업분야에 들였지만 남은 것은 농가의 부채와 노인만 남은 농촌이 됐다.
 농업인들의 시위를 보면서 농촌의 아들로 부모님 일손을 돕던 아련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70년대 중고교 시절,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봄철 새벽녘에 모내기를 위해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모판에서 모를 찌고 모내기를 했던 일, 모를 낸 다음엔 할머니 어머니와 모가 제대로 꼽히지 않은 곳에 모를 누비며 한 개 모라도 더 심던 일, 모내기 후 어른들과 둘러앉아 먹던 모밥의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가을엔 낫으로 벼를 베고 볏단을 묶고 손수레로 집 마당까지 나르고 타작을 하며 발동기 속에 고구마를 쪄서 먹던 일 등이 떠올라 그때가 그립다. 또 가을걷이를 마친 논에서 한 톨의 벼도 버리지 않기 위해 허리춤에 다래끼를 달고 곱은 손을 비벼가며 이삭을 줍던 일들은 어린시절 또렷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사실 과거 우리네 농정은 쌀 증산을 위해 학생들까지 퇴비증산에 나서게 하고 농번기엔 3, 4일 방학으로 집안의 일손을 돕도록 배려(?)도 했다. 또 소출이 많은 통일벼를 강요하고 쌀 맛 좋은 품종은 소출이 적다는 이유로 제한하는 질보다는 양을 중시했다. 오늘 날과 전혀 다른 농촌모습이다.
 현재 농촌은 산업화와 개방이라는 파고 앞에 철저히 부서지고 있다.
 “농업인의 생존권을 좌우할 쌀 협상 국회 비준이 이대로 처리되면 쌀 농업은 물론 한국농업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농업인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 같아 안쓰럽다.  정부가 쌀값 안전을 위해 100만석을 추가로 매입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농촌은 이미 공황상태에 빠져있다. 더욱이 정부가 추곡 수매제를 폐지하고 공정직불금과 변동직불금을 지급하는 등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공공비축제’를 도입했지만 대부분 농업인들이 내용이 복잡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홍보 미흡보다는 농업인들의 수준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닐까. 지금 농촌을 지키고 있는 농업인들은 대다수가 60, 70대 노인들이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부에서 외국쌀과 경쟁, 이기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견 수긍이 가는 얘기다. 외국 쌀에 비해 값은 비싸지만 “소비자들에게 우리 쌀만 먹겠다”는 여론이 형성되도록 국산 쌀의 안전성과 품질은 높이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늙은 농업인에게 고품질 농사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아니더라도 ‘초가삼간 집을 지은 내고향 정든땅’으로 시작되는 대중가요 ‘흙에 살리라’에서 보듯 농촌은 우리 모두의 고향이자 안식처다. 쌀 개방이 대세인 현실을 외면하고 감성적으로 농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힘없이 무너져간다'는 농촌의 아우성이 너무 안타까워서다. 쌀 개방시대에 농촌이 경쟁력을 갖추는 실효성 있는 정책을 간절히 바란다. 농촌을 살려야 나라가 산다. yido@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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