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저 남쪽은 벌써 몇 주 전부터 쪽빛 제비꽃, 금빛 민들레, 붉은 원추리, 흰 찔레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여기 강원도에선 아직 좀 기다려야 하지만. 이런 시차(時差)를 생각해 보다가 떠오른 시 하나. 아니다, 사실은 봄기운이 천지를 휩싸고 돌기 시작할 무렵부터 음미해 보고 싶은 시가 있었다. 이백(李白)의 '봄 생각(春思·춘사)'이 그것이다.
 "연(燕) 땅의 풀이 푸른 실과 같을 때/ 진(秦) 땅의 뽕나무는 푸른 가지를 드리웁니다/ 그대 돌아가려고 생각하는 날/ 그때는 저의 애가 끊어지는 때이겠지요/ 봄바람은 날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일로 비단 휘장에 들어오는 것일까요."
 시의 서정이 현대인들만큼이나 세련됐다. 분위가 오늘 우리의 메마른 감정을 젖게 만든다. 하북성 연나라는 날씨가 추워 풀이 아직 실 같을 뿐인데, 이백은 남방 섬서성의 뽕나무 가지에 잎이 무성하다 하고 있다. 강원도가 아침저녁으로 여전히 추울 때 남녘엔 봄이 한창이듯이.
 이백은 봄바람에 애간장을 태운다. 우리는 오늘 나라를 염려하지도 않고 인생파적이지도 않은 그가 부럽다. 늘 세상을 걱정한 두보(杜甫)와는 달리 호방한 성격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안 됐지만, 우리는 지금 이백처럼 봄 서정에 젖을 수 없다. 두보 쪽이다. 나라의 분위기가 엉망이어서 그렇다.
 미국 예일대 휘트니 인문학센터장이자 불문학자인 피터 브룩스는 육체 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을 성적 측면에서의 육체로 본다. 서양에서 이런 시각은 일반적이다.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에게도 이런 생각이 엿보이는데, 그의 글을 보자.
 "나는 마지막 베일이 벗겨져 나가는 순간,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녀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눈이 부셨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분홍빛을 띤 듯한 그녀의 하얀 육체가 은은한 촛불 아래 반짝였다. 마치 얇은 비단 덮개에 살짝 가려진 조각처럼. 아니, 아니, 그녀에게는 사랑의 눈길을 두려워할 신체적 결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발자크의 '상어 가죽'이라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소설에서 육체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들어간다. 즉,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육체를 매개로 부와 권력과 명예와 신분 상승을 꾀하려 한다. 발자크에게서 여체는 욕망의 상징 덩어리다. 인간의 몸은 생물학적 성(性)임과 동시에 사회적 성이요, 권력이요, 이데올로기요, 정치적 메시지라는 것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 역시 인체를 찍은 사진조차 "객관적 관찰이나 기록이 아니라 권력이다" 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선 늘 그런 것이 아니니 조심해야 한다. 대문호와 석학이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세상엔 전혀 다른 상황과 현상이 있게 마련이다. 한 정치가의 '여자 가슴 사건'은 이제 여체 또는 유방이 브룩스와발자크와 푸코를 비롯한 다수 남성들과 그들로 말미암은 제도의 편향적 전유적 일방적 관심과 고찰의 오랜 피압박 시대를 마침내 건넜음을 새삼 깨닫게 했다. 유방이 유방의 소유자인 여성의 존재 표징으로서의 권력이지 일상에서 남성 성애적 의미를 포함한 갖가지 일그러진 상징 대상이 아님을 다시 인식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봄이다. 강원도는 아침저녁으로 아직 추운데, 남녘은 확연히 봄이다. 이와 같은 계절의 섬세한 차이를 이백은 '봄 생각'에서 여실히 노래했다. 인간의 몸에 관한 남성과 여성의 종래의 미세한 시각차 같은. 남성 의식은 아직 추운 연나라요, 여성은 이미 잎이 무성한 진나라인 것 같은. 인식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진화의 차이 같은.
 그러므로 이백의 '춘사'를 감상하고 싶은 마음을 일게 한 진실은 무엇인가. 봄인가? 아니, 여성의 가슴인가?
이광식 논설실장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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