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 민속놀이 중에 격구(擊毬)가 있다. 조선조 초기에 유행했던 격구는 타구(打毬) 혹은 우리 말로 공치기로 불려졌다. 최근 격구에 관한 재미있는 학설이 제기됐다. 조선조 개국직후 말을 타고 하는 기마격구 외에도 막대기로 공을 쳐서 구멍에 넣는 격방(擊棒)이 있었다. 격방이 오늘날 골프형태와 같다는 학설이다. 이 학설은 유럽의 학회에도 소개돼 골프가 중세 동양에서도 유행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중국 베이징(北京) 스포츠박물관에 소장중인 명나라 초기의 '골프를 즐기는 여인들(士女圖)'에는 골프채를 메고 있는 캐디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조선의 격구는 궁중의 군신부터 민간 어린이까지 광범위하게 즐겼다. 태종실록 13년 2월조에는 서울 광화문우체국 옆 혜정교 거리에서 곽금이, 막금이, 막승이, 덕중이 등 어린이 4명이 격구를 하는 광경이 기록돼 있다.
 세종(1418~1450)도 큰 아버지 정종(1398~1400)과 아버지 태종(1400~1418)을 모시고 격구를 즐겼다. 세종실록 3년 11월조에는 격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치는 막대기는 숟가락 모양이며 크기는 손바닥만 하다. 물소 가죽으로 만들었다. 두꺼운 대나무와 합하여 자루를 만들었다. 공 크기는 계란만 한데, 재료는 광물질인 마노(瑪瑙)나 나무로 만들었다. 땅을 주발과 같이 파서 이름을 와아(窩兒)라 한다. 혹은 전각을 사이에 두고 혹은 섬돌 위에, 혹은 평지에 구멍을 만든다. 서서 치기도 하는데 공이 날라 넘어 가기도 하고 구르기도 한다. 공이 구멍에 들어가면 점수를 얻는데 규칙이 복잡하고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종은 보위에 오른 후 동생 태종의 정치적인 야심을 눈치채고 보신하다 양위했다. 재위 2년 동안 따분한 경연을 탈출하고 싶어, 팔 다리가 저리고 아프다는 핑계로 격구를 통해 몸을 풀겠다는 뜻을 자주 표했다. 신하들은 환관이나 소인배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선에서 양보했다. 그는 임금을 모시고 격구를 한 공으로 신하 4명에게 말 1필씩을 하사하기도 했다. 어느날 정종은 경연도중 옆에 있던 사관(史官) 이경생에게 물었다. "격구하는 것조차도 사책(史冊)에 기록하겠느냐". 마침 대신들과 환관들이 격구를 즐기던 것을 본 정종이 함께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사관에게 전한 것이다. 사관들이 뭐라고 기록할지 은근히 겁도 났던 것이다. 정종에게 돌아온 사관의 대답은 동지날 찬바람 같았다. "인군의 거동을 반드시 쓰는데, 하물며 격구하는 것을 기록하지 않겠습니까"
 600년 세월이 살같이 지나 연간 골프장 이용객이 1780만명이다. 도내 골프장 26개소도 성업중이다. 주말은 물론 주중에도 문전성시다. 평균 30만원을 투자하고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나이스 샷"과 "굿 샷"을 외친다. 주말은 물론 주중에도 골프장을 찾는 고위공직자가 많다는 게 골프장 측의 전언이다. 혹은 가명으로 혹은 골프장 운영업체들의 사업비밀 뒤에 숨어 골프를 치고 혹은 내기도 한다. 조선 정종의 사관 이경생이 봤다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인군의 격구도 사책에 기록하는데, 하물며 공복의 골프를 기록하지 않겠습니까" 격구도 좋고 골프도 좋다. 문제는 때와 장소, 그리고 함께 치는 상대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남궁창성 편집부국장 겸 사회부장 cometsp@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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