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연 영동본부 취재부장

 400여년 전 강릉에는 개혁 사상가 교산 허균((1569∼1618)이 있었다. 8회를 맞는 허균·허난설헌문화제가 지난 주말 초당 솔밭 사이 생가에서 열렸다. 한·중 학술세미나에서는 사대부로 태어났으면서도 당대의 학문적 풍토와 윤리 규범을 뛰어넘은 기인으로, 유교적 신분제약에 반기를 든 개혁적 사상가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교산의 모습이 4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재조명됐다.
 토론자로 학술세미나에 참석해 자리를 지키는 동안 강릉시의 홍길동 캐릭터 활용 방안 부재에 대한 시의회의 비판이 떠올랐다.
 '전남 장성군이 상업적인 용도로까지 홍길동 마스코트 활용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반면 강릉시는 장성군에 앞서 특허 등록을 마치고서도 오락가락 세월만 보내고 있다'며 강릉시의 늑장 행정이 도마에 올랐다.
 교산은 누이 난설헌의 문집을 발간하고 중국을 오가며 작품을 전파했다. 그 결과 난설헌은 중국, 일본에서도 오늘날까지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말로 '마케팅'에 다름 아니다.
 또한 유교의 벽을 넘어 도교와 불교, 천주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적 궤적을 남긴 교산은 적서차별의 부당함과 신분을 가리지 않는 인재 등용 등 당대 사회가 용납하지 않을 혁명적 사상을 홍길동전에 한글로 담아 '어린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개혁적 사상가일뿐만 아니라 시대를 앞선 사상의 실현을 빈틈없이 준비한 교산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강릉에서 교산의 가르침은 찾아보기 어렵다.
 역적으로 몰려 정치적 패배자로 전락한 데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지난 시절, 교산의 개혁적 사상을 논하던 인사가 '기관'으로부터 고초를 당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신경 쓸 일이 아니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통성 시비에 휘말린 광해군 시대의 격동기를 살며 그저 '무사'했다면 오늘날 '개혁적 사상가'란 타이틀은 아예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류의 역사를 밟아 온 강릉의 정체성에도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교적 이념이 지배했던 4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2006년 강릉에서 교산의 '개혁적 사상과 미래를 연 지혜'는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다행히도 요즈음 강릉에는 '변화'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 자치단체는 물론 시민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늘 풍성했던 곳간이 비워져 가는 경제적 위기감이 변화를 부추기는 배경이다. 주변 지역의 발빠른 변화도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이제 헛기침만으로 비워지는 곳간을 다시 채울 수는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변 도시들이 인정하지 않는 '영동 수부도시'라는 말도 더 이상 쓰지 말자거나, '혁신도시, 대관령면, 강릉-원주대 통합 등 주요 현안에서 뒷북만 치고 있다'는 자기 비판도 들려온다.
 그러나 변화를 향한 실천에는 여전히 서투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나 저항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사상과 학문, 삶조차도 가히 '혁명적'이었던 교산이 2006년 강릉의 '패러다임'으로 제격인 이유다. 400년 만에 고향 강릉으로 돌아온 교산은 그토록 사랑했던 고향 강릉과 강릉 사람들에게 '시대를 앞서 살아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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