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창성 편집부국장 겸 사회부장

 기자는 북한과 세번 만났다.
 1984년 대학생 시절 미국방문을 앞두고 안보교육을 받으며 북한을 만났다. 권위주의시대 반공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기자는 열아홉 나이에 유효기간이 1개월 남짓한 단수여권을 받아들고, 첫 외국 방문길에 오르며 정보기관의 안보교육을 받았다. 미국에 체류하며 혹 있을 수 있는 북파 간첩과의 접촉 가능성을 경고 받고, 간첩 식별과 비상시 대처요령 등을 교육받으며 안보의식을 한층 다지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기자에게 북한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자가 두번째로 북한을 만난 것은 지난 2001년 중국 방문길이었다. 기자는 당시 중국 동북 3성의 중심인 랴오닝성(遼寧省) 선양시(瀋陽市)에서 북한의 한 여인을 만났다. 외화벌이 일꾼으로 북한요리를 파는 '평양관'에서 만난 평양음대 출신의 최옥미(가명)양은 기자에게 북녘의 동포이자 누이였다. 당시 기자는 선양에서 3일동안 체류하며 평양관에 자주 들렸고, 최양과는 눈인사를 할 정도의 구면이 됐다. 어느날 저녁인가는 북한 외화벌이 일꾼들이 하는 반주에 맞춰 그녀와 '아침이슬'을 열창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통일이 이뤄지는 날 대동강변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베이징(北京)으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베이선양역(北瀋陽驛)으로 향하며, 최옥미와 악수를 하는 동안 느껴지던 그녀의 거친 손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당시 북한처녀 최옥미를 통해 만난 북한은 안타까움이었다.
 기자가 세번째로 북한을 만난 것은 2002년 북한의 신의주특구 취재를 위해 중국 단둥(丹東)과 북한의 압록강 일대를 취재하면서 였다. 기자는 당시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로 알려진 압록강 철교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잘려져 나간 압록강 단교(斷橋) 건너편의 남루한 북한을 목격했다. 기자가 묵던 중련대반점(中聯大飯店)에서 바라본 북한은 죽은 도시였다. 압록강 철교를 건너 캄캄한 북녘땅으로 사라져 가는 새벽의 북한열차를 바라보며,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룬 중국 단둥과 북한을 비교하며 잠을 설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다음날 조선족 무역상의 안내를 받아 단둥 하구촌(河口村)에서 이뤄진 북한 국경수비대 병사들과의 만남은 비참한 북한의 현실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남루한 옷차림에 북한동포의 탈북차단이 주목적인 북한의 국경수비대원들은 기자 일행에게 담배와 술을 요구했다. 그들이 어깨에 AK 소총을 매지 않았다면 기자는 그들을 국경을 책임지고 있는 병사라고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국경수비대 병사들에게 담배 한 보루를 건네고, 되돌아 오는 압록강 시골길에는 추적추적 가을비가 하루종일 내리고 있었다. 2002년 가을 중국 국경에서 만난 북한은 기자에게 두려움도, 안타까움도 아닌 단지 동정과 한탄의 대상이었던 기억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2006년 10월 9일 오전.
 북한 핵실험 소식을 접하고, 차를 급히 돌려 편집국으로 향하며 기자는 북한을 생각했다.
 그들은 이제 10대 후반 어린시절 기자가 처음 경험했던 공포의 대상도, 30대 후반 중국 국경에서 느꼈던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 2006년 오늘의 북한은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일까. 핵실험 소식을 접하고, 기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북한의 모습은 한 손엔 총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담배와 술을 요구하던 2002년 조중(朝中) 국경에서 만난 북한 병사의 왜소한 잔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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