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 편집부국장 겸 경제부장

 8년 전이었다. 계절도 이맘때였다.
 금강산 관광선의 첫 출항지로 선택된 동해항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감격과 흥분으로 술렁였다.
 도내 최대의 항구라고 해도 취급 화물이라고는 시멘트 클링커가 거의 전부였던 그리 유명할 것도 없는 항구가 하루 아침에 세계 뉴스의 중심으로 부상, 연일 도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필자는 그때 그곳에 있었다. 그것도 구경꾼이 아니라 50년간 닫혔던 냉전의 바다가 열리는 전 과정을 빠짐없이 취재 수첩에 담으면서 이른바 역사를 목도한 '행운아'였다.
 크루즈 유람선의 개념조차 제대로 모르던 때. 단골로 다니는 서점을 통해 크루즈 유람선에 관한 책자를 주문 구입해 탐독하면서 금강산 관광선 취재에 말 그대로 푹 빠졌다. 지금은 고인이 된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도 가까이에서 그렇게 자주 만난 때가 없었다. 아버지가 소 한마리를 팔아 놓은 돈 70원을 몰래 들고 북녘 강원도 통천 고향에서 가출한 빚을 갚고자 그해(98년) 6월에 500마리, 10월에 501마리의 통일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평화이벤트를 펼쳐보였던 그는 인생의 마지막 열정을 대북사업에 쏟아부으려는 듯 툭하면 동해항에 나타났다. 그가 10월에 두번째 소떼 방북을 할때 500마리에서 1마리를 더 보탠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는 것을 암시하는 뜻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그리 많지않다.
 '금강호'가 첫 출항을 하던 11월18일 오후. 동해항 여객터미널 귀빈실에서 만난 정 회장은 늙고 야윈 몸을 추스리기도 힘겨워 보였다. 아직 겨울은 아니건만, 매서운 바닷바람이 옷 속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부둣가의 야외 출항식 행사를 견딜 수 있을까 심히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터운 외투를 받쳐입고 단상에 오른 그의 돋보기 너머 눈빛이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는 것을 필자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를 분신처럼 따르던 정몽헌 회장과 김윤규 사장도 입만 열면 뉴스가 됐다.
 그러나 역사의 장난인가. 그때 동해항에서 뉴스 메이커로 통했던 그들 3인방은 금강산 관광 만큼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지금은 고인이 됐거나 불명예스러운 퇴진 상황에 처해있다.
 특히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북사업을 지휘하던 정몽헌 회장이 사법당국의 조사와 재판중에 지난 2003년 8월 서울 계동 현대사옥 12층에서 투신한 사건은 대북사업 험로를 실감케하는 충격이었다.
 그런 금강산 관광사업이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대북사업 상대방인 북한에서 미국의 경제제재에 맞서 ‘핵실험’이라는 초강수 카드를 꺼내든 때문이다. 핵실험 소식이 타전된 뒤 단체 예약자중 금강산 관광을 포기하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다니 심상치 않다. 99년 관광객 억류사건, 2002년 서해교전 등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는 어김없이 휘청거렸지만, 이번은 그 수위가 사뭇 다른 것 같다.
 금강산 관광은 분단국의 분단도인 남·북 강원도를 잇는 대북교류사업이다. 설악∼금강 연계 활성화 등 과제가 아직 요원하기는 하지만, 냉전의 산물인 접경지역이라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강원도는 냉전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금강산 관광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동반자처럼 경제위기를 함께했다.
 이번에도 금강산 관광이 벼랑끝으로 몰리고, 먹구름이 경제 전반을 짓누르자 부동산·건설 경기 침체 심화, 외자 유치 차질 등의 우려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쏟아지고 있다.
 8년전 겨울의 문턱, 첫 출항때 마주친 장전항의 황량한 잿빛 풍경화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이 좌초 위기라는 소식이 들려올때마다 98년 동해항에서 맛보았던 열정이 꺾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아마도 그것은 분단도 강원도가 온전히 화해의 새지평을 열때까지 계속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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