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 편집부국장 겸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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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교토 인근의 우지시에 평등원(平等院·뵤도인)이라는 사원이 있다.
 지금부터 거의 1000년 전인 1053년에 지어진 건물로 일본 불교미술의 정화로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헤이안(平安)시대 중기, 섭정 및 관백으로 무소불위 권세를 떨쳤던 후지와라 요리미치(藤原賴通)가 교토 근처 우지(宇治)에 있던 자신의 별장을 사찰로 바꾸면서 지은 많은 건물 중 하나다.
 일본의 국보이기도 하지만 10엔짜리 동전의 배경 그림이기에 더욱 유명하다. 뵤도인을 방문하고 돌아온 관광객들은 이 건물을 말할때 꼭 10엔짜리 동전을 언급한다. 목조 건물로 천년의 생명력을 이어온 뵤도인의 건축미가 우수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10엔짜리 동전이 그 유명세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엊그제 1000원과 1만원권 우리나라 지폐가 24년만에 새로 발행됐다.
 새 1만원권 지폐는 뒷면 바탕 그림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국보 228호)로 하고, 천체시계인 혼천의(渾天儀·국보 230호)와 국내에서 가장 큰 천체망원경인 보현산 천문대의 천체망원경(지름 1.8m)을 함께 넣는 등 천문과학의 역사를 담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태조가 한양 천도를 한 것을 기념해 그 이듬해(1394년)에 만들었다고 하지만, "전쟁으로 소실된 고구려 시대 석각 천문도의 탁본을 토대로 제작했다"는 발문 기록이 있어 사실은 '고구려 밤하늘'이라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구려 밤하늘이라면 중국의 순우 천문도(1247년)보다 더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석각 천문도 일 수도 있으나 그동안 일반인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생소했다.
 이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새 1만원권 뒷면의 바탕 그림으로 채택되자마자 과학계의 환영과 함께 관심이 집중되면서 지난 19일에는 재조명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1만원권 새 지폐로 인해 앞으로 우리 국민 가운데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경제활동의 수단인 화폐가 일상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프랑스 루이 16세와 지폐의 악연을 더듬어 보면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앙시앵레짐(Ancien Regime) 타파와 대혁명의 기운이 한창이던때 프랑스에서는 아시냐(Assignat)라는 지폐가 대량으로 발행됐다. 그 지폐의 인물 도안이 루이 16세 초상화였다.
 그런데 그것이 루이 16세에게 큰 화근이 됐다. 물가폭등과 경제파탄에 이어 혁명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던때 마부로 변장해 외국으로 탈출하려던 왕을 알아보게 한 것은 지폐에 그려진 초상화였다. 농부의 신고로 붙잡힌 왕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지폐가 체포전단이 된 셈이다.
 역사상 거의 유례를 찾기 어려운 악연을 예로 들었지만,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명소 도안들은 거의 대부분 그 나라와 민족의 자긍심을 함축한다. 오죽하면 프랑스 과학자인 피에르 퀴리와 결혼한 퀴리부인을 프랑스와 모국 폴란드에서 동시에 지폐의 인물 도안으로 사용하고 있겠는가.
 이같은 중요한 의미와 가치 때문에 새 지폐가 발행된 지난 22일에 맞춰 일련번호가 빠른 새 지폐를 확보하기 위해 중앙은행 앞에는 수집 마니아들이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화폐로 말한다면 뵤도인을 보유한 일본의 우지시처럼 강원도와 강릉 또한 크게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법하다. 대현 율곡 선생이 태어난 오죽헌이 과거 5000원권 뒷면의 배경 그림이 된데 이어 지난해 발행된 새 5000원권은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를 배경 그림으로 채택했다.
 지폐 한장에 도시가 낳은 역사 인물과 명품이 모두 수록된 곳을 강릉 말고 또 찾을 수 있겠는가. 뵤도인을 보고 10엔짜리 동전을 떠올리듯이 오죽헌에서 청소년 수학여행단이, 한류(韓流) 관광객들이, 또 서양의 이방인들이 5000원권을 꺼내들고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는 모습을 그려본다.
 세상의 관심이 새 지폐에 쏠린 요즘, 아예 강릉으로 넘나드는 대관령 길목에 '5000원권의 도시'를 상징하는 걸작 조형물이라도 하나 세워봄이 어떨까.
dychoi@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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