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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송

신흥사 부주지
옛 스님들은 자신을 ‘산승(山僧)’이라 표현하길 좋아했다. 절이 산에 있으니 당연히 절에 사는 스님은 산승이 되겠지만, 이 말속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

1980년대 초반, 당시 종정의 자리에 오른 성철스님은 주변에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포교차원에서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대적인 법회를 갖자고 권유하자 “산승(山僧)이 산에 있어야지, 어딜 간다 말이고!” 라고 일갈했다. 그만큼 산과 승은 한 몸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9월말부터 대청봉에서 시작된 설악의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산승의 즐거움 중 하나는 자연의 변화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새싹이 신록을 지나 단풍이 되는 모습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경이롭다. 자연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그 변화를 눈여겨 관찰하다보면 여러 가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단풍을 보고 일시적으로 참 아름답다, 참 좋구나 이렇게 생각할 줄만 알지 그 단풍을 통해 모든 것은 생(生)했으면 늙고 병들고 그 마침이 있다는 것을 볼 줄은 모른다. 단풍이든, 사람이든, 미물이든, 그 어떤 것이든 생한 것은 결국에는 마칠 날이 있는 것이다.

봄에 새싹이 지금 단풍과 다르지 않고 여름에 무성했던 잎이 지금 이 단풍과 다르지 않고 멀지 않아 땅에 뒹굴 저 낙엽이 지금 이 단풍과 다르지 않다. 알고 보면 다 하나이다.

우리가 보는데 따라서 그것이 달리 보일 뿐이지 근본자리에서 보면 단풍이나 낙엽이나 그 여름에 무성한 잎이나 새싹은 결국은 다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느냐부터 시작해서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잘못 살았는데 잘 죽을 리 없고, 젊어서 내가 복 짓지 않았는데 나이 들어 복 받을 리 없고,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는데 자식이 내게 효도할 리 없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뿌린 대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옛 스님들은 차별로 보는 자는 범부중생이요, 하나로 보는 자는 성현이요, 부처라 했다.

고려시대 나옹스님은 “백년지시잠시간 (百年只是暫時間)이러니 막파광음당등한(莫把光陰當等閑)하고, 노력수행성불역(勞力修行成佛易)이거니와 금생차과출두난(今生差過出頭難)이네. 무상홀도교수체(無常忽到敎誰替)하랴, 유상원래용자환(有償元來用自還)이어늘.”이라고 했다.

즉, “백년도 잠깐이니 세월을 등한히 하지 말고 노력 수행하면 저 성불하는 것도 쉽거니와, 이 생을 잘못 살면 그 업을 벗기는 더욱 어렵다. 이 무상한 죽음을 뉘라서 대신할 수 있겠는가, 빚은 원래 스스로 갚는 법이다.” 라는 것이다.

누가 내 이 빚을 대신해줄 수 있고, 누가 내 업을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 내 업은 내가 짓지만 또한 내가 받아야 된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이 빚을 갚을 사람은 없다. 국가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한 개인도 그렇고 어느 누구든지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받게 된다.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오늘의 이 단풍을 그냥 단풍으로만 즐기지 말고 참 지혜를 구하는 가르침으로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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