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식 논설실장
“아무튼 눈에 떠올라. 아이들이 호밀밭에서 놀고 장난치는 모습이. 수천 명의 아이들이. 그 주위엔 아무도 없어. 어른도. 나 빼고는 아무도 없어. 그런데 내가 무서운 낭떠러지 가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는 일이야. 내 말은 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무턱대고 내달리면, 내가 어디선가 불쑥 나와 그 애들을 붙잡는 거야. 그 일을 온종일 하고 싶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거지. 미친 짓이라는 거 알아.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바로 파수꾼 역할이야. 미친 짓이지.”

조금 길게 인용했지만, 이 글은 미국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1919~ )의 자전적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라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195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작가의 체험을 소재로 쓴 성장소설인데, 퇴학당한 한 소년이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 눈떠가는 과정을 10대들이 즐겨 쓰는 속어와 비어를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한 매력적인 작품이다.

인용한 부분을 읽을 때 필자는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어휘를 떠올렸다. 측은지심이란 ‘사려분별 없는 어린아이가 우물을 향해 기어갈 때 그 아이를 덜렁 들어올리는 마음씨’라는 의미다. 맹자는 인간에겐 본디 이 같은 어진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러나 이 인간 본성 사단(四端) 중 하나인 ‘인(仁)’에 대한 것이 아니다. 독서에 관한 얘기다. 이미 계절은 책 읽기 좋은 깊은 가을이 아니던가.

미국 대학생들은 50여 년이 넘은 옛날 책 ‘호밀밭의 파수꾼’을 지금도 여전히 즐겨 읽는다. 샐린저의 이 호밀밭 이후 미국 대학생들은 리차드 브라우티건(Richard Brautigan)의 ‘미국에서의 송어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를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 일본의 대학생들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태재치;1909~1948)의 ‘사양(斜陽)’을 거의 미친 듯이, 그야말로 끈질기게 읽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나? 책을 읽고 있기나 한 건가? 80년대 초까지는 우리 대학생들도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열심히들 읽었다. 요즘 젊은이들도 책을 끼고 다니긴 한다. 예컨대 ‘10억 만들기’ ‘부자 되는 습관 99 가지’ ‘토플’ ‘토익’ 등이 그것들이다.

무엇이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런 따위의 책을 읽게 만들었는지 개탄스럽다. 자유시장론이 우리 대학생들의 의식을 거의 완전히 돈에 돌아버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 편,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의 작가들이 소설 장르를 젊은이들 손에서 멀어지게 만들지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이를 테면 장편 단편 할 것 없이 인류가 소장하게 된 명편들이 실로 엄청난 양인데, 우리 문학은 여기에 보탠 게 별로 없는 듯하다는 얘기다. 70년대에는 우수한 작품이 더러 나왔지만, ‘광주’를 지나고, ‘시의 시대’를 지나면서 대가족 붕괴, 박정희 깨지고, 그 뒤 마이카 시대, 아파트 시대, 그리고 찾아온 물신주의와 소비주의, 여기에다가 의식 없는 젊은 작가들, 허약하고 이기적인 신세대 글쟁이들, 인문적인 교양은 물론 문체의 멋과 맛을 잃은 소설가들뿐, 이들이 점령한 문단, 그리고 문예지는 파벌 혹은 엘리트주의로 갈라져 있고….

이러하니, 우리 젊은이들이 미국 일본의 대학생들처럼 불후의 명작을 읽으려 들겠는가 말이다. 이 독서하기 좋은 가을날 아깝고도 안타깝다, 그저 돈 벌 재주만을 익히려 하다니. 최소한의 낭만마저 용서받지 못하는 엄혹 냉혹한 시대에 살며 꿈을 잃어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저 측은지심을 느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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