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 정 록
서울본부 정치부장
나폴레옹이 첫 유배지인 엘바섬을 탈출했을 당시 프랑스 파리의 언론은 악마가 엘바섬을 탈출했다고 썼다.1815년 2월의 일이다. 유럽에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알린 탁월한 사상가이자 전략가였던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실패와 함께 엘바섬으로 유배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는 7개월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당시 파리가 얼마나 놀랐는 지는 언론보도로 짐작이 가능하다. 파리언론은 20여일에 이르는 입성 기간 동안 나폴레옹을 악마에서 코르시카의 늑대, 호랑이로 바꿔부르다 파리입성 직전 “황제께서 파리에 입성하셨다”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굳이 거창하게 나폴레옹을 떠올리는 이유는 이회창 후보의 대선출마에 대한 언론들의 반응 때문이다.

국내 보수언론을 비롯해 대부분의 언론은 이 후보의 복귀를 “원칙을 저버린 노욕의 결과”라며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보수 유력언론의 논객은 이 후보의 정신건강까지 문제삼고 나섰다. 그만큼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 후보에게는 몇 가지 원죄가 있다. 새삼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국민 절반에 가까운 지지자들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줬고 차떼기로 상징되는 구시대 정치의 한 복판에 이 후보가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이 후보의 출마번복이 우리 사회에 과연 원칙과 대의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는 점이다. 정계은퇴선언을 번복하며 읊조리는 ‘믿어달라’는 신파형 곡조를 2007년에 다시 듣게 되는 국민들은 심난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는 원칙과 대쪽이미지를 통해 민심을 사로잡았던 이가 아닌가.

이 후보는 지난 97년 정치권에 입문한 직후 강원대에서 기존 정치권을 향해 ‘더러운 정쟁’이라고 비난하며 중앙 정치권의 전면에 등장했다. 정치신인이던 이 후보가 주류로 등장하기 위해선 기존 정치권을 한 몫에 잘라 버릴 필요가 있었다. 이 후보의 ‘더러운 정쟁’ 발언은 당내 치열한 권력투쟁을 초래했고 당의 대선후보로 자리잡게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권력은 집중되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했다. 이 후보의 몇몇 측근들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승리감에 도취해 전권을 휘둘렀고 이들이 쳐놓은 인의 장막은 덫이 되었다. 이 후보는 대선패배와 함께 눈물로 정계를 떠났다.

한동안 패배주의와 무력감에 시달리던 한나라당은 총선과 지방선거를 기반으로 또다시 대선에서의 승리를 장담하는 단계까지 성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이 지점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1년 가까이 지속돼온 50%에 가까운 지지율이 문제였다.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이던 대세론과 그에 편승한 자신감은 당내에서조차 ‘오만의 극치’로 비난받아야 했고 급기야 이 후보의 출마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 후보가 97년 발언했던 ‘더러운 정쟁’은 돌고 돌아 2007년에 ‘원칙없는 후보’로 바뀌었다. 그가 주장하는 원칙은 아마 친북적인 유연한 대북인식과 경제지상주의적 정책관, 이명박 후보 개인의 도덕적 문제 등이 겹쳐 있는 것 같다. 이 후보는 한나라당이 제 발등을 찍는 사이 그 공간을 활용, 대선판을 흔들고 있다. 이 후보 주변에서는 벌써 “지난 대선 때 지금과 같은 정치력을 보였다면 몇 번 승리하고도 남았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귀양을 떠나면서 “제비꽃이 필 때 돌아오겠다”고 했다. 이 후보에게도 제비꽃이 피었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는 그 가능성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유동적인 상황이 국민들에게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흔들리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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