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춘
건국 이래 59년 동안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기는 9차례. 국민 직선은 언제나 뜨겁고 치열하고 혼탁한 가운데 치러졌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격렬했던 대선은 6차례 들 수 있다. 6차례 선거 모두 국민들에게 기쁨과 실망과 충격을 주는 갖가지 이변을 드러냈다.

첫째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독선과 횡포, 장기집권에 대해 민주당이 결연히 저지에 나선 1956년 3대 대선. 정·부통령 후보인 신익희와 장면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절규와 같은 구호로 맞섰으나 신 후보의 급서로 정권교체의 꿈이 무너졌다. 둘째는 5·16쿠데타의 당위성 여부를 심판한 1963년의 5대 대선. 윤보선은 ‘군정이냐, 민정이냐’라는 표어를 내세워 박정희 정권에게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셋째는 3선 개헌 후의 박정희가 3선에 출마했던 1971년의 7대 대선. 40대 기수인 신민당의 김대중은 다양한 공약을 내걸고 출마했으나 고배를 들었다. 넷째는 유신과 5공의 어두운 긴 터널을 벗어나기 위해 16년 만에 직선이 부활된 1987년 13대 대선. 야당후보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의 후보단일화 실패와 분열로 5공의 후계자인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었다. 다섯째는 1997년의 15대 대선. 당의 이념과 노선, 그리고 정치적 성장배경과 기반이 전혀 다른 김대중과 김종필이 내각제 개헌과 요직안배라는 밀약·야합으로 김대중이 당선됐으나 내각제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외면했다. 끝으로 한나라당 이회창이 두 아들의 병역면제 논란과 비난공세로 두 번째 낙선했던 2002년 16대 대선. 노무현은 정몽준과 후보단일화협상에서 성공한 후 투표일 전날 정 후보가 합의 파기 선언으로 크게 당황·낙심했으나 분위기의 반전으로 당선됐던 것이다.

드디어 23일간의 법적 선거운동이 끝나고 오늘 역사적인 제17대 대통령선거일을 맞았다. 이번 대선의 의의는 참으로 막중하다.

지난 4년10개월 동안 국민에게 많은 논란과 화제를 제기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을 심판하게 된다. 아울러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져온 진보적인 노선의 계승과 10년 만에 보수정권의 복원여부를 판가름 짓게 될 것이다.

이번 대선은 전례 없는 여러 가지 이변과 기록을 남겼다. 먼저 대통령에 대한 국민직선사상 가장 많은 수의 후보들이 나섰다. 12명이 후보등록을 한 후 2명이 사퇴하고 10명이 완주했다. 후보들의 지지율의 경우 가깝게는 3개월, 길게는 6~8개월 동안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이 큰 등락없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고착·지속되어온 점이다. 여기에 어처구니없는 것은 후보·정당들 간의 정책·공약경쟁이 거의 실종됐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선거 때마다 고질병으로 드러났던 지역주의가 일부 퇴조했다고 볼 수 있다.

투표일인 오늘까지 계속되어오는 선거정국-선거 분위기는 매우 험악하고 어지럽고 불투명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2000년 이명박 후보가 광운대 특강에서 “BBK는 내가 만들었다”고 한 동영상이 폭로된 후 정동영·이회창·문국현 등 모든 후보들은 이 후보를 공격하고 국회는 범여권의원들이 이 후보 특검안을 통과시키는 등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후보측은 변함없는 높은 지지율로 당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한 자신을 음해하고 흔들고 몰아내려는 음모이자 공작이라고 일축하고 특검도 앞서 검찰처럼 무혐의로 결론 낼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극한대립은 대선 후에도 연장전이 이어져 새해 정국과 4월 총선, 새 정부의 출범 등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감케 한다.

이런 혼돈·대립의 중대시국에 주권자인 국민들의 책임은 실로 크고 무겁다. 빠짐없이 투표장에 나가 누가 국가발전을 이끌 참다운 지도자인지, 가짜·엉터리지도자인지 확실히 선택해야 한다.

투표하지 않거나 어영부영 투표를 한 후 또 다시 5년을 개탄하고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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