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식 논설실장
이명박 당선인이 주장하던 ‘한반도 운하 건설’이 구체화되는 듯하다. 환경론자 생태학자 반(反)문명론자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환경 파괴와 지구 온난화를 염려할 때에 그러나 한반도 운하 건설은 제 갈 길을 가는 것 같다. 그리고 운하가 지나가는 주위의 땅 값은 이 시간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뛰어 오르고.

물론 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논자들의 입을 막으려는 얘기도 있다. ‘인터네셔널 헤럴드 트리뷴’ 지에 ‘항저우에서의 생태적 승리(An ecological triumph in Hangzhou)’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중국의 대운하는 베이징(北京)~항저우(杭州)까지 1747km에 달한다. 진시황 때 착공돼 수나라 양제 때 완성됐고, 대운하는 당시 중국으로서 경제 및 국민 통합에 대단히 편리한 수단이 됐다. 경제적 이유로 만들어진 운하는 2400 년 동안 쉼 없이 화물선을 나르기에 바빴고, 지금도 연간 10만 척의 배와 2억6만 톤의 화물이 통과하고 있다. 환경오염을 극복한 운하는 이제 역사적 문물 및 문화자원으로써 의미가 크다.”

중국의 운하 건설의 역사는 자못 길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와 수(隋)나라의 양제(煬帝)는 기상과 몸집이 서로 닮았다. 하는 일이 지나치게 장대하여 마침내 수습할 수 없게 돼 나라를 망친 점도 흡사하다. 두 사람의 특이한 성격은 각기 만리장성과 대운하라는 유산을 남기게 된다. 양제의 운하 공사에는 500만 명이 동원됐다. 수많은 백성이 고통을 겪었지만, 이 운하는 후세 사람들에게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사실 운하 건설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오나라의 왕 부차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기원전 486년에 양자강과 화수이를 연결함으로써 남북을 관통하는 운하를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중국 최초의 운하인 ‘한독’이다. 그 뒤 위나라가 한독에다가 황허를 연결하여 ‘홍독’을 건설하고, 진시황이 ‘영거’를 만들고, 예의 수나라 양제가 ‘광통거 영세거 통제거 한구 강남하’ 등을 건설한다. 그리하여 이 운하들을 통해 물자를 나르며 인구 4700만의 수나라가 인구 300만의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는데, 결국 지나친 토목공사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하여 수나라는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

운하 건설이 역사를 바꾼 셈인데, 살펴보면 여기에 한 역설이 담겨 있다. 동북아 역사에서 ‘요하시대’는 고조선과 고구려가 대륙의 연나라와 영유권 확보를 위해 투쟁하던 시대다. ‘한강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300여 년간 대치하던 시대다. 그리고 ‘대동강시대’는 발해의 남진과 통일신라의 북진 정책이 200 년 간 출동하던 시대다. 즉, ‘강의 시대’가 쟁투의 시절이었음에 비해 ‘운하의 시대’는 진나라 수나라처럼 통일의 시대였다는 얘기다.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 대운하를 건설한다. 이런 측면에서 곧 들어설 이명박 정권의 한반도 대운하 건설 사업은 긍정적 상징적 이해의 측면이 없지 않다. 생태 생명 환경 논의를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작금의 대운하 건설 논란을 보는 강원도의 가슴은 그러나 고독하다. 논의 및 논란의 현장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독재와 반독재 투쟁에서도, 민주와 반민주, 민주주의의 공고화 혹은 글로벌 문제로 치열한 논리 전개를 하는 중에서도 지난 반세기 동안 강원도는 입도 뻥끗해 보지 못했다.

한 가지 따져보자. 옛날에는 유명한 산에 있는 샘이나 물을 강의 발원지로 보았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를 천지로, 한강의 발원지를 오대산 우통수로 본다. 낙동강의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천의봉 동쪽계곡이다. 또 한강 발원지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산 동쪽계곡이라고도 하는데, 기존 자료에는 또 강원도 삼척군 삼장면 대덕산이 발원지라 한다.

어느 곳이 발원지이든 강원도에서 발원된 것이 분명한데, 발원지 사람들의 의견은 운하 건설의 경우 전혀 들어보려 하지 않는다. 들어 볼 것도 없다는 태도다. 겨우 경기도 여주 옆 원주시 어느 한쪽에 운하 터미널이 생긴다 하여 땅값이 조금 들썩일 기미가 보인다는 정도다. 성골과 진골과 새로운 로얄 패밀리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주위에, 문경 충주 상주 등지에, 한반도 운하 주변에 생겨날 터인데, 그 때에도 강원도는 여전히 육두품 이하요, 영원한 주변이다. 강물을 내는 지리적 적자임에도 담론을 생산해낼 줄 모르는 가난한 강원도는 정치 문화적 불행을 계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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