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했던 유신시절인 1978년 12월의 10대 총선거를 앞두고 이해 가을 여야는 후보공천작업에 들어갔다. 여당은 외부와 차단된 안가에서 제1야당인 신민당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공천작업을 했다. 신민당은 3일간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심사하다가 기자들에게 추적되자 의사당내 야당 대표실에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의사당 주변은 연일 200~300여명의 공천신청자, 비서, 보좌관 및 당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작업이 막바지에 들어가던 어느날 심사장 밖에서 “이 더러운 인간들아…”하는 고함소리가 계속되다가 갑자기 “사람이 죽었다”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회의는 중단됐고 모두가 밖에 나가 보니 당의 중견간부인 A씨가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고 의사당의 기둥은 피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A씨는 대학을 나온 후 인생의 목표를 고향에서 출마, 금배지를 다는 것에 두고 근 25년 동안 논밭을 팔아가며 고난의 야당생활을 해왔다. 그는 10대 총선을 마지막 기회로 보고 빚을 내서 온갖 정성을 쏟았으나 공천탈락소식이 전해지자 파벌공천·돈공천을 성토비난한 후 돌기둥에 머리를 받은 것이다. 다행히 그는 목숨은 건졌으나 울화병을 앓다가 몇 년 후 숨졌다. A씨 사건 외에도 야당은 공천 때마다 으레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편파적인 심사위원들을 죽이겠다고 칼을 품고 추적하는가 하면 어느 때는 낙천자 측근들이 도끼로 당사를 부수는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1960~1990년대 여야는 중앙당에서 당 간부들로 심사위를 구성해 공천작업을 벌였다. 결과는 여당은 당 총재인 대통령의 독단공천, 독재공천, 야당은 밀실공천·돈공천 계파공천 낙하산 공천이었다.

그런데 요즘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이 극심한 공천홍역을 앓고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 친 이명박계와 친 박근혜계 간의 힘겨루기가 주원인이다. 박 전 대표 측은 친이 측이 보이지 않는 손을 써 원내외 자파 인사들을 잇따라 낙천시키고 있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고 친 이측은 외부인사들이 주도하는 공천심사위원회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반박하는 등 어수선하다.

그러나 엄격심사를 공언했던 한나라당 심사위가 11일 현재 245개 선거구 중 확정한 167곳 가운데 여러 명의 철새족, 그리고 전과경력자까지 공천한 것은 문제가 적지 않다.

17대 대통령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줄 곧 지지율이 11~20%선에 머무르고 있는 통합민주당에 있어 법조인 출신의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의 행보는 “저승사자” “흑기사” “잔다르크” “염라대왕”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단연 화제감이다. 부정비리의 전력자는 공천불가라는 당헌규정을 고수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측근 등 11명의 정계 재진입을 차단한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단수 신청자를 그대로 공천 확정한 55곳 중 현역의원 38명 전원을 포함시킨 것은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심사위가 설정한 의정활동 당 활동에 모두가 합격점이라는 것도 그렇고 비리의혹으로 재판에 계류 중인 인사까지 모두 포함시킨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단 문제 있는 곳은 유보 또는 낙천한 후 당에 새 인물을 발굴하도록 권유했어야 했다.

이제 금주 말은 양당 심사위가 넘어야 할 최대의 고비다. 한나라당은 강남과 특히 영남지역에서 얼마나 얼굴을 교체하고 민주당은 호남에서 과연 30%물갈이를 강행할지 궁금하다. 어차피 변화와 개혁 쇄신에는 저항과 반발이 있게 마련이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공정성 엄정성 과학성이다. 엄정하고 과단성 있는 공천 계파와 지역 계층에 좌우되는 흔들리는 공천은 18대 총선에서 정확하게 평가받게 될 것이다. 파벌공천·밀실공천·지역공천은 타파돼야 한다. 구태공천은 총선패배의 지름길이다.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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