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나대신 모시게해 미안"...

“연정, 아우야 얼마만이냐. 아버지 어머니 모시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았다. 의당 형인 내가 모셔야 했는데, 미안할 뿐이구나”

17일 ‘평양’ 에 살고 있다는 형 泓正씨(68)의 편지를 받아든 강릉시 연곡면 신왕리 金蓮正씨(66)는 평생 형을 그리다 차마 눈을 못 감으시던 부모님 생각에 굵은 눈물 방울부터 떨궜다.

16절지 두장 분량의 편지에는 북쪽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 이제는 2남3녀의 자식을 모두 출가시키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에서부터 형 대신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게한 점에 대한 맏이로서의 미안함, 하루빨리 통일 돼 다시 만나 정을 나누자는 기원에 이르기까지 천마디 말보다 진한 그리움이 적혀있었다.

편지와 함께 전해진 두장의 사진 속에는 그동안 가물가물하던 형의 모습이 마치 환생한 듯 살아 있었다.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등 모두 10명의 대가족이 둘째아들 결혼식때 함께 찍은 사진속 형은 백발이 완연한 노인이었지만, 蓮正씨는 어릴때 다정했던 형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蓮正씨는 이제 편지까지 받았으니 “곧 만날 날이 있지 않겠냐”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江陵/崔東烈, 李振錫


"형님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북강원도 고산군 부평리에 있는 작은아버지 南澤鎭씨(68)로부터 아버지(南明鎭)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편지로 접한 浩七씨(53·원주시 일산동)는 그동안 살아계시길 갈구했던 마음이 일순간 무너져내리자 깊은 아픔으로 눈물을 흘렸다.

澤鎭씨는 편지에서 “조국 분단이 가져다준 쓰라린 현실을 통탄하며 하루속히 만나고 싶다”며 “조국통일이 오는 날 그리운 어머니께 남먼저 달려가 큰 절을 올리자고 하시던 형님은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고향을 밟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가장 원통하다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전했다.

편지는 또 “오래오래 살아계셔서 일가친척들과 함께 상봉할 날을 기다려 달라”며 “우리 모두 조국통일을 앞당기는데 온 힘을 쏟자”는 말로 글을 맺었다.

지난 52년 영덕·영일지구 전투때 영덕군 병곡면 다리골에서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붙들려 간 아버지의 생사를 몰라 사망신고를 하고 매년 제사(현재는 예배)까지 지내왔다는 浩七씨의 누님 琴仙씨(55·원주시 문막읍 동화2리)는 “어버지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편지에 적혀있지 않아 가장 궁금하다”며 “앞으로 서신교환이나 상봉을 통해 자세히 알고싶다”고 안타까워 했다.

原州/全寅洙 isjeon@kado.net


"5남매 낳고 잘산다" 근황에 안심

‘자나깨나 보고싶은 동생 수림에게’

17일 오전 북쪽 형 玉林씨(73)의 편지를 받은 金洙林씨(70·춘천시 후평3동)는 자신을 그리워하며 쓴 형의 떨리는 글씨체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부터 쏟아냈다.

자신은 국군으로, 형은 인민군으로 헤어졌던 50년전 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줄 한줄 편지를 읽어 내려간 金씨는 형의 사진이 봉투속에 없는 게 못내 아쉽기만 했다.

金씨는 “지난 13일이 어머님 기일이었다”며 “돌아가시던 날까지 형님을 보고 싶어 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생각나 너무 늦게 온 편지가 야속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형 玉林씨는 편지에 인민경제대학과 건설건재대학을 졸업한 후 기업소 책임자로 일하면서 자식 5남매를 낳아 모두 나라의 일군이 됐다며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

그는 특히 “꿈결에도 보고싶은 동생의 소식을 받고 보니 50년 력사에 처음으로 이뤄진 기쁨으로 가슴이 막 뜨거워진다”, “보고싶은 동생들아 지금 이 형님의 마음은 막 진정을 부를 길이 없이 너희들이 그리워 무엇부터 어떻게 편지를 쓸지 모르겠다”는 등 맏형으로 동생들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金씨는 형의 편지에 “지금이라도 만나게만 해 준다면 뛰어가겠다”며 “편지를 받고보니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春川/金根成 root@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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