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연 소설가
집 앞 영동고속도로 옆에 새 광고판이 생겼다. 그 규모가 워낙 큰지라 바로 앞에서 뭔가가 가리지만 않는다면 인근 십여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다. 색채 역시 강렬하고 선명해서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그곳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 익숙한 풍경 속에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무엇이 나타난 탓이리라. 그것도 호들갑스럽게. 광고판의 내용은 이렇다. 귀여운 여자아이가 활짝 웃는 남자의 목말을 타고 있고 바로 옆에는 아이의 엄마가 서 있다. 그러니까……일가족이 강원도 평창으로 여행 와서 매우 행복하다는 뜻을 전하려는 사진인 것 같다.

집 뒤 비탈 밭에서 아침부터 당귀를 캐던 날이다. 단단하게 굳은 늦가을의 흙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당귀를 쇠스랑으로 캐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는 아직 산을 넘어오지 않았기에 시린 손을 자주 모닥불 앞에서 비볐다. 추위와 고단함을 달래려면 소주 몇 잔도 들이켜야 했다. 모닥불 주변으로 깔리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리 따스하지 않았다. 힘들여 농사지어봤자 더 이상 돈 벌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부러진 허리에 빚을 짊어진 채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더 답답하다는 푸념이었다. 돈을 벌 수 없는 까닭은 아주 간단했다. 농산물 가격이 농사짓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넘지 못한다는 것. 나야 뭐 거의 가짜 농사꾼이니 의견을 꺼내놓지는 못했지만 농부의 자식으로 살아온 이상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움켜잡은 쇠스랑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물집만 터뜨릴 뿐이었다.

강원도로 여행 온 일가족의 행복한 듯한 모습이 실린 광고판 상단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다. 당신의 휴식처. 물론 그 광고판은 여행객들이 세워놓은 것은 아니다. 당연히 여행객들의 의견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이와 아빠, 엄마의 얼굴에서 쉽게 시선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기획자에 의해 연출된 사진임이 분명하겠지만 마음은 아주 쉽게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어떤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질투와 동경의 마음을 뒤섞은 채.

그렇게 허공을 떠돌다가 쇠스랑 부러지는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비탈 밭으로 돌아왔다. 당귀 뿌리를 캐지 못한 쇠스랑은 대신 흙속에 숨어 있던 바위를 찍고 부러졌다. 여기저기서 날아와 등에 꽂힌 화살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사위어가는 모닥불 옆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밭 아래 고속도로엔 끝물의 강원도 단풍을 보러가는 차량들로 가득했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관광버스에선 쿵쾅거리는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속도로 전체가 차량들의 긴 띠로 연결돼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들을 욕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모두 다 하루하루의 고단한 삶을 살다가 시간을 쪼개 여행을 떠나는 거 아니겠는가. 다만 우리가 그들의 휴식처에서 돈도 안 되는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언제부턴가 이 땅에서 농업은 거의 모든 것을 도시에 내준 채 벌거숭이로 내몰린 것뿐이다. 눈치 빠른 사람은 농촌을 떠나버린 지 오래고 우직하게 땅을 지키는 사람들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떠나간 이들의 땅을 사들여 소작료와 직불금이나 타먹었을 뿐이다. 소주 몇 잔에 힘을 얻은 나는 새 쇠스랑을 들고 비틀비틀 당귀 밭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날이 저물어도 광고판은 조명을 받아 더욱 선명하다. 광고판 속의 가족에겐 어둡고 추운 밤이 없는 것만 같다.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스크린에서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그 아래서 영화를 올려다보는 우리는 춥다. 추워서 벌벌 떤다. 내 휴식처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의 휴식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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