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기배

춘천 광장감리교회 담임목사
오늘날처럼 각박하며 이기주의가 팽배해있고 자기만 아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신비를 헤아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믿음조차도 자기감정에서 우러나오며 모든 것을 자기입장에서 자기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도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의 깊은 사랑의 신비를 알 수 있을까.

하루는 예수님께 부자청년이 찾아왔다. 청년은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계명을 지키라 하셨다. 이에 청년은 어릴적부터 계명을 충실히 지켜왔다고 했다. 그의 대답에 예수님은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다. 계명을 잘 지킨다는 그가 이 말씀에는 근심하여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십계명의 중심은 법규정이 아니다. 사랑의 도리인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확인하신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 아닌 이웃에 대한 계명이었다. 그는 계명을 다지켰다고 했으나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모르는 체 할 수 있을까. 주위의 형제에게는 못하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먼저 인간에 대한 계명들을 물어 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대신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는 곳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의 화신이다. 사람이 사랑할 때 내가 이제 사랑해야지 해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무작정 계획하고 생각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일이 쉽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깊은 은혜 안에서 있을 때에 사랑이 생겨나고 깊어지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영적인 깊은 은혜 안에 있을 때에 고린도전서 13장과 같은 사랑의 찬가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을 본다. 율법 안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말로만 하나님이나 이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과 이웃들을 위해 수고의 짐을 함께 지고 기쁨으로 사랑해야 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모두가 움츠러들고 위축되어 여유와 배려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감사의 표현도 돌아올 실익을 계산하며 따지게 된다. 배려와 감사의 마음이 무너진 사회는 터가 무너진 사회에 다름 아니다.

이 가을에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사랑을 기억하고 배려와 감사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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