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창의

관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역사상 가장 어려운 평준화가 둘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부’의 평준화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의 평준화이다. 세상엔 언제나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빈부차이를 없애기 위해 나타난 사람이 유대인 ‘칼 마르크스’였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점점 대중의 인기를 잃게 되었고 맏형격인 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대 실패로 막을 내린다.

세계 인종 중에 도시의 빈민에서 부자로 변신하는 능력을 제대로 보여 준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그들은 1차 산업이나 2차 산업보다 3차 산업에서 더 많은 부가가치가 생성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다. 그리고 선진국 도시의 3차 산업화를 촉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본래 고대 유대인의 정신적 바탕은 ‘부’의 평준화였고 공산주의를 만든 사람도 유대인이었으나 끝없는 인간 욕망의 칼날을 세우며 돈 모으는 데 여념이 없었던 사람들도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부’를 차지하고 계속 유지하기 위해 교육에 각별하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교육을 시킨 덕인지 유대인 중에 노벨상 수상자도 많고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교수도 다수다.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만을 키우고 있는 절름발이 교육일 수도 있는데 하여튼 유대인 교육은 세상에서 나름대로 통하고 있다.

유대인 따라하기에 열심이던 프랑스도 유별난 교육에 지친 나머지 대학까지 평준화시켰으나 지금은 도로 원점이다. ‘그랑제꼴’ 천국으로 변해가고 있다. 사회에서 행세깨나 하려면 별도의 엘리트학교인 ‘그랑제꼴’을 나와야 한다. 평준화된 대학을 나와 가지고는 실업자 되기 십상이다. 결국 교육의 평준화도 국가의 합리적인 생각일 뿐, 개인의 욕망과는 동떨어진 정책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특목고 세상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특목중, 특목초 세상이 올 지도 모른다. 사실 예고를 제외하고는 진정한 의미의 특목고는 거의 없다. 유명 외국어고등학교에 외국어 전문인재로 키우려고 보내는 학부형이 몇이나 될까? 올해 모 대학은 싹쓸이 논란까지 감수하며 특정 외고 출신을 수시에 대거 합격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대학입시에 유리하다 보니 특목고로 몰리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전국에 특목고가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 동네 불량배 학교로 통하던 실업계 고교마저도 이름만 특목고로 바꾸었더니 서로 들어오려고 난리란다.

사회전체를 놓고 이야기 할 때는 ‘평준화’가 맞다하고 개인이나 자기 자식만을 생각한다면 합리적 사고가 작동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첫애가 공부 못하면 ‘평준화’에 찬성표 던지다가 공부 잘하는 둘째 애가 학교 들어 갈 때면 ‘비평준화’로 태도가 돌변하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평준화’가 불순하게 태어났다고 한다. 중학교에 이은 고등학교 평준화의 기막힌 시점은 “특정인을 봐주기 위한 것 아니냐”란 의심을 받기도 했다. 더 어이없는 일은 그 당시 정권에 아부하던 사람들은 지금 ‘평준화’를 반대하고 있고, 정권타도를 외치며 투쟁하던 측은 극구 찬성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때 사교육비를 없애겠다고 과외를 금지시킨 적도 있지만, 주최 측이 비밀과외로 재미를 보자 너도 나도 과외를 다시 하게 되고 저들 스스로 “과외금지는 위헌”이라며 자폭하는 닮은 꼴 아이러니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부’의 평준화가 실패하고 ‘교육’의 평준화도 시들해져 가고 있다. 합리성과 욕망이 각기 다른 동네서 놀고 있기 때문이다. 남보다 더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막을 순 없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고 좋은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을 때, 평준화란 단어가 국론분열의 도구로 전락한다는 사실이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숫자를 늘리는 것과 ‘못 가진 사람’과의 간격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자본주의가 결승전에 올라와 다 이긴 경기를 놓치지 않는 관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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