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창의

관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행복의 기준은 뭘까. 많이 가졌다는 것일까 아니면 마음이 편안한 걸까. 고대 그리스의 우화작가인 이솝은 후자에 무게를 둔 것 같다.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서 심심하게 사는 시골 쥐에게, 서울 쥐는 서울 자랑을 늘어놓는다. 마음이 흔들린 시골 쥐는 상경한다. 처음에 황홀해 하던 시골 쥐는 서울에선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곧 깨닫고 다시 시골로 내려온다” 이야기의 원전은 이솝이지만 서양의 거의 모든 나라가 비슷한 내용과 구성을 가진 ‘스토리텔링’이 있고 그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반면 “사람의 자식은 서울로 보내고 마소의 새끼는 시골로 보내라”는 우리 속담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의 서울은 기형적으로 비대증을 앓고 있다. 전체의 48%를 차지하는 우리의 수도권 인구는 영국 26%, 프랑스 19%, 일본 27%인 것에 비하면 편중이 너무 심하다. 그러나 속담처럼 서울로 간 자식들이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서울로 진출하는 지방학생 수는 많아지고 연령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역사를 보면, 시골에서 도회지로의 인구 이동은 돈의 논리였다. 과거 유럽에서 외국인은 농업에 종사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래서 유태인은 장사치로서 도시에 살 수밖에 없었다. 유태인이 살던 ‘게토’는 요즘 말로 도심지의 ‘빈민촌’인 셈이다. 밀을 생산하는 농민들의 수입이 해마다 10%씩 늘어날 때, 밀을 원료로 과자를 만드는 공장 사람의 수입은 20%씩 증가했고 그 과자를 판매하는 유태인은 악착같이 이윤을 챙겨 50% 이상의 소득 증가를 누리게 되었다. 소득이 3차 산업으로 갈수록 커지면서 3차 산업의 중심지인 도시로 인구가 몰렸다. 시골에 있으면 뒤처지고 서울로 가야 유태인처럼 부자가 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유럽은 시골에 빈집만 늘어나는 꼴을 벌써 오래 전에 겪었다.

인구과밀과 집값 폭등, 거대도시 등장 등 수 많은 도시문제에 봉착한 선진국들은 2차 세계 대전 후 ‘삶의 질’ 논리로 지방화에 박차를 가했다. 지방 곳곳에 행복도시를 만들고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대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지방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제는 농촌이 부유해지고 문화생활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우리의 지방은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다. 정책마저 거꾸로 가고 있으니, 선택의 문제를 넘어선 구조의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하다. 졸속 추진된 기업·혁신도시 정책도 지역 간 분열만 조장하더니, 결국 땅 정보를 꿰뚫고 있는 고위층들의 배속만 채워놓고 수도권 규제 완화로 허탈해졌다. ‘투표수’ 논리로 지방을 ‘버림 패’로만 본다면, 국토의 88%는 사막과 무인도로 변할 것이다. 마지못해 내놓은 재탕, 잡탕 식 ‘지방대책’이란 것도 ‘수도권 공화국 헌법의 별책 부록’을 보는 듯하다.

정보화 덕분에 시골의 단점은 많이 줄어들고 있다. 인공에 진저리가 난 사람들은 다시 자연을 찾게 될 것이다. 기계와 빌딩에 부속품이 되어 가는 데 지친 도시민에게 시골은 새로운 선택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새는 바가지’를 서울로 보내봐야, 외국으로 보내봐야 새는 건 마찬가지니, 집안에서 꼼꼼히 꿰매어 그 그릇에 맞게 키우고 일하게 함이 옳다고 정신 차릴 날이 올 것이다. 물질보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시골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도움은 못 줄망정, 정부가 앞장서서 서울 쥐에게 뻥튀기 과자 더 주겠다고 시골 쥐의 알량한 싸라기마저 빼앗아 간다면 궁지에 몰린 시골 쥐의 성난 모습에 당황해 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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