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병로

사회 1부장
20년 전 상황이 흑백 필름처럼 돌아간다. 관객도 여전하고 주연과 조연도 똑 같다. 필름은 전혀 낡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하다. 선명한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밀려온다. 대립 각을 세운 두 주연은 한 치의 양보도 없고 물러섬도 없다. 당당함을 넘어 유치하기까지 하다. 연출자의 의도가 소름을 돋게 한다.

1989년과 2009년. 20년의 차이는 무엇일까? 20년을 훌쩍 뛰어넘은 2009년 1월. 바람은 날선 칼날처럼 예리하다. 그 바람 앞에 선 서민들은 여전히 허둥댄다. 갈 곳이 없다. 식상한 듯했던 ‘민주’라는 단어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현실. 여전히 서울공화국은 건재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온갖 파렴치가 쏟아진다. 화염병이 등장하고, 쇠파이프가 허공을 가른다. 경찰 특공대도 떴다. 테러범(?)이 판을 치는 세상 같다. 그러나 아니다. 테러범도 없고, 더더욱 우리가 부숴야 할 적은 없다. 가난과 소외, 어찌할 수 없는 절망만 있을 뿐이다.

문민의 정부에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어 MB정부가 닻을 올린 지 1년. 세상은 그러나 20년 전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다. 그렇게 느껴진다. 지난 20년에 대한 온갖 ‘수사’가 난무하지만 지방민이 갖는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 주변과 변방이라는 소외의식.

강원도는 또 어떤가.

지난 1월 19일. 강원도 교육현장에선 20년 전 상황이 재연됐다. 교단에 서야 할 교사가 같은 동료(?)에 의해 또 다시 거리로 밀려났다. 밀려난 교사는 20년 전처럼 투쟁을 선언하고 눈을 부릅뜬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 갈 것”이라고. 상대편은 한 술 더 뜬다. “해 봐라. 똑같은 방법으로 응징 하겠다”고. 20년 동안 그렇게 공들여 가꿨던 대화와 협상, 타협의 문화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로지 “나 아니면 안 된다, 내 생각과 같지 않으면 무대에서 사라져라”는 편협과 아집만 공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누굴 탓할까? 20년 전 외신은 ‘한국의 민주화가 싹 튼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지난해 국회 상황을 지켜 본 외국언론(타임)은 ‘한국의 민주의식, 아프리카보다 낮다’고 썼다. 국회에서 펼쳐진 활극을 빗댄 말이다.

국회 활극은 보란 듯이 우리사회 구석구석으로 번지고 있다. 국회활극에 전염돼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교단 위의 교사가 거리로 내몰리는 현실. 학습효과는 이처럼 무섭다. 우리 사회에 도대체 ‘민주의식’이 있기라도 한 걸까?

20년 전 교사들이 밖으로 내몰릴 때 태어난 아이들은 이제 스무 살이 됐다. 성년이다. 그러나 교육집단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듯하다. 여전히 싸움질(?)이다. 하긴, 양지와 음지가 뒤바뀌었으니 그도 그럴밖에. 그러나 교육현장은 싸움터가 아니다. 정치판은 더욱 아니다. 당부하고 싶다.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또 어떤 국민이 “이 나라에서는 도저히 못살겠다”며 보따리를 쌀 지 모를 일이다. brka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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