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식 논설실장
인간은 정보를 소비하는 자가 아니라 어떤 행위를 하는 존재, 즉 행동주의자(Behaviorist)이다. 이 말은 인간이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며 인격화하고 또 발전한다는 의미다. 행동주의자인 인간의 행위 중 하나로 스포츠가 있다. 스포츠를 잘 활용하면 몸을 돕고 인격을 도야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삶은 운동 곧 스포츠라 하여 지나치지 않다.

행동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위험과 한계에 도전하길 즐긴다.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기이하게도 인간은 도전할 위험이나 한계가 없으면 굳이 이겨내야 할 갈등 상황을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이 창안한 것이 갈등 상황의 한 형식인 스포츠다. ‘스포츠 놀이론(論)’과는 좀 다른 측면에서 스포츠의 발생 및 기능을 논해 보면 이러하다는 얘기다. 한 마디로 ‘즐겁게 놀자’ 하여 생겨났다고 보지만, 고난 극복을 통한 자기완성의 길을 찾기 위해 인간들이 스포츠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이런 스포츠가 현대에 이르러 좀 변질됐다. 스포츠는 하나의 거대 산업이 된다. 예컨대 구단주가 팀을 잘 경영하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 또 스포츠는 언제부터인가 0.0001초의 차이로 승패를 가르는 등 수치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쯤 되면 스포츠는 이미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비난받아 마땅한, 너무도 집요하여서 병적인 인간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측면에 대한 염려와 비판은 칼 마르크스에게서 이미 나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스포츠 철학 또는 심리학에서 논의되고 있다.

우루과이의 대표적 좌파 언론인인 에두아르도 갈레이노 역시 자신의 책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서 현대 축구가 지나치게 상업화함으로써 ‘단순한 기쁨의 미학’을 앗아가 버렸다고 개탄한다. 하지만 그는 성격이 좀 다른 말도 잊지 않았다. “축구와 조국은 항상 함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축구는 전쟁의 형식적 승화’라는 요지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다음과 같은 일화를 보면 정말 그렇다.

1942년 나치 점령 아래에서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축구팀’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던 독일 팀을 격파한다. 이기지 말 것을 사전 경고 받았음에도 민족의 저항 의식 고취를 위해 일을 저지르고, 유니폼을 입은 채 11 명의 우크라이나 선수들은 총살당하고 만다.

그러므로 축구를 어찌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02한일월드컵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엊그제 강릉에서 사상 최초로 강원도 프로축구팀의 ‘격렬하고 장엄한 경기’를 본 우리로선 더욱 축구가 즐거움 이상의 그 무엇, 요컨대 인간의 도전과 극복의 두드러진 방법 또는 자기 성장 및 도야의 한 방식임을 보고 또 느꼈다. 이럴 경우 정치적 득실, 경제적 이득 따위는 부차적 위치에 놓아도 좋다. 엄청난 고통과 희망, 희열과 전율을 안겨 주는데 무슨 정치 경제 사회학 따위인가.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여자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은 군대 얘기다. 두 번째가 축구 얘기다. 가장 듣기 싫어하는 얘기는 그러므로 군대에 가서 축구한 얘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웬걸 2002년 이후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요즘 K리그 서포터즈에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그 한 증거다. 축구의 정치 경제 사회학이라고? 축구의 문화현상이라고? 그렇다. 우리는 엊그제 강릉 경기에서 축구가 사회 발전의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우리들이 본 그것이 바로 현대 축구의 현상학이다.

행동주의자 인간은 즐거움이나 개인의 완성뿐 아니라 사회 통합을 위해 이렇게 스포츠를 활용하는 역동적이고 단순하고 순수한 그리고 꽤 흥미롭고 매력적이고 창조적인 존재다. 이렇게 축구하는 인간을 논함으로써 강릉 경기에 대한 감동을 대신한다.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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