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재상

관동대 미디어문학과 교수
다산 정약용의 산문들을 정갈하게 번역해낸 자신의 책 ‘뜬 세상의 아름다움’에 써 붙인 서문에서 박무영 교수는 다산의 생가를 찾아갔던 최근의 씁쓸한 경험을 나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생가 주변은 먹고 자고 노는 집들로 포위된 형국이었고, 복원된 생가의 ‘여유당(與猶堂)’은 아예 신혼부부들의 결혼기념촬영 세트장을 방불케 했던 것이다. 다산의 유배 때문에 수 십 년이나 서로 떨어져 살면서도 다산과 부인 홍씨는 60년 동안이나 더없이 성실한 남편과 아내로 살았다. 그 점에서 박무영 교수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은 쓰라리기 한량없다. “부부가 되려는 사람들이라면 사랑의 맹세에 이보다 더 좋은 곳, 더한 증인이 어디 있을까. 왜 우리는 광대처럼 차려 입고 연극장면 같은 사진 촬영을 하고, 그리고는 부산하게 옷자락을 거머쥐고 이곳에서 떠나야 하는 문화 속에 사는 것일까.”

대통령이 감독과 함께 ‘워낭소리’를 감상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왠지 난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막강한 자본과 마케팅을 앞세워 전세계를 초토화시켜버린 미국 영화의 거듭되는 공격을 가히 예외적으로 잘 견디어내며 성장해온 우리 주류영화가 그나마 이젠 자본과 배급망을 움켜쥔 몇몇 강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승자독식 구조가 고착화되는 판에, 그때나 지금이나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 속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저예산 독립영화계에 대통령이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그나마 우리 독립영화계의 현실을 대충 알고 있는 나로선 특히나 반가워 해야 할 일이 틀림없다. 그런데, 가슴이 철렁하다니. 자라 보고 놀란 새가슴이 솥뚜껑 보고도 놀란 건가.

왜 우리나라에선 닌텐토 같은 ‘돈 되는’ 게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느냐는 대통령의 즉흥적인 말 한 마디에 여러 사람들이 일시에 호들갑을 떨어댔던 최근의 씁쓸한 기억 때문일까. 행여 우리의 대통령이 ‘워낭소리’가 2000만원도 안 되는 예산으로 200만명이나 되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낭보를 접하고는, “아, 저예산 독립영화도 대박 터뜨리는 상품이 될 수 있구나!” 하고 귀가 번쩍 뜨이신 건 아닐까. 이제 관련 공무원들이 이 땅의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빨리 제2, 제3의 ‘워낭소리’를 만들어내라고, 어서들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내놓으라고 채근하는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워낭소리 현상’ ‘워낭소리 신드롬’은 분명 의미있는 사건, 모처럼의 소중한 사회적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을 ‘문화상품’의 성공사례로 간단히 환원시켜선 안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 경험이 우리를 이끌어가야 할 곳은, 일차적으로, 무관심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뭔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해내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애정과 관심을 확대시키고, 그런 행위들을 통해 그들이 우리에게 건네주려고 애쓰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성찰을 우리 모두의 성찰로 심화 확대시켜 나가는 실천적인 삶일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워낭소리’라는 감동적인 독립영화와의 만남을 이 땅에서 특히 우리 지역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런 문화활동들에 대한 관심과 참여, 후원을 시작하는 하나의 실제적인 계기로 만들 수 있다. 우리 곁엔 정동진 독립영화제가 있고 강릉시네마떼크가 있지 않은가.

‘문화상품’이라는 말은, 자칫 우리에게 허깨비에 홀려 헛것을 보게 만드는 말이다. 아지랑이처럼 몽롱하고 아편처럼 달콤한 그 희한한 신조어의 그럴싸한 외관 아래엔 무서운 자기모순의 함정이 엎드려 있다. 진정한 문화는 우리가 당장의 상품화에 급급하는 순간, 그 존재 자체를 위협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다투어 몰려들어 아귀아귀 뜯어먹은 다음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딴 곳으로 몰려들 가는 화전민(火田民)식의 거친 손길로 우리 삶의 가장 풍요로운 원동력, 원천들을 하나하나 거덜을 내버려서야 되겠는가. 관광과 더불어 문화가 우리 강원도의 미래가 걸려 있는 가장 큰 화두임이 분명한 이상,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혹독하게 우리 안의 이 질문과 싸워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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