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해창

제자감리교회목사

(춘천연탄은행 대표)
지금 교회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순례하는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서 시작하여 부활절까지 40일 동안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는 절기이다. 사순절을 영어로 ‘렌트(Lent)’라고 하는데 이는 ‘봄’이란 뜻이다. 사순절은 차가운 대지에 찬란한 봄날의 희망과 믿음이 싹을 틔우고 성장하는 소망의 계절이다. 주님이 따뜻한 봄날에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있을까? 주님은 생명이 파릇파릇 소생하는 봄날에 왜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을까? 모든 생명이 푸른빛을 잃고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날 고통스러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다면 계절적으로 더 실감 날 텐데, 왜 모든 생명이 대지의 딱딱함을 뚫고 일어서는 생명의 계절에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을까?

봄은 겨우내 땅속에서 움츠렸던 모든 생명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다 드러내게 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은 대지의 모든 생명을 다 살아나게 한다. 얼어붙은 땅속에 언제 그런 아름다운 것들이 있었는가 싶게 온갖 생명들이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모습을 뽐낸다. 온 산은 진달래로 울긋불긋하고, 거리 곳곳에는 노란 개나리가 유치원 어린이들처럼 깔깔거리며 반갑게 인사하며, 목련과 벚꽃들은 꽃망울 활짝 열어놓고 신비로운 웃음을 짓고 있다. 대자연 곳곳에 이름 모를 봄꽃들이 시골처녀마냥 수줍어하며 피어 있다. 이것들이 그동안 어디에서 추운 겨울을 지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죽은 것처럼 보였던 저들은 결코 죽은 것도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겨우내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던 저 산하(山河)에 ‘저런 아름다움이 있었구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봄은 이렇게 만물이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계절이다. 여기에 주님의 십자가 정신이 있다. 주님이 봄 향기 가득한 따사로운 날에 무서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신 것도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봄바람이 추위와 냉기를 녹이고, 메마르고 딱딱한 굳은 땅을 뚫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듯, 주님의 십자가는 죄와 죽음으로 움츠러진 우리의 아름다운 것을 회복하고 향기롭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봄바람이 불면 땅의 모든 생명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전에 감추고 있던 것들을 다 드러내고 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진정한 기쁨을 감출 수 없다. 김상미 시인은 ‘봄의 기쁨’이란 시(詩)에서 ‘봄은 그래/ 기쁨을 절대로 억제하지 않아/ 조용조용/ 무엇이든 드러내려고 해’라고 노래했다. 주님의 사랑은 봄바람과 같다. 봄바람이 대지 모든 생명을 자꾸 툭툭 건드리고 어루만져서 그들 속에 아름다운 것을 다 드러내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 사랑도 우리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자유, 평화, 사랑, 기쁨, 감사 같은 아름다운 것들을 마구 드러내게 한다. 황무지 같은 땅에 아름다운 생명을 돋아나게 하는 봄바람의 힘을 군대나 탱크, 핵탄두나 미사일, 세상 그 무엇으로 억제할 수 없듯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주님은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이 땅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다.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있는데 사랑이다.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 그 아름다운 사랑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다. 그 사랑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 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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