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규

상지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사회 곳곳에 패거리주의가 만연해 있다. 어느 분야를 가든 이런저런 연고로 맺어진 패거리가 주도권 다툼을 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가리지 않고 나선다. 때때로 사회적 차원에서는 연고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사적 이익 앞에서는 패거리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오죽하면 ‘패거리 공화국’이라는 주장까지 나왔을까. 패거리주의에 관한 한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강준만은 패거리주의를 “연고나 정실 등에 의해 형성된 배타적인 집단이 모든 공적 원칙과 명분을 초월하거나 훼손하면서 집단적 이익을 우선시 하는 성향 또는 행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패거리주의의 폐해는 바로 공정 경쟁의 원칙을 파괴하고, 심각한 사회적 손실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능력이나 도덕성이 부족한 사람이 단지 연고 때문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학연·혈연·지연 ·교연(종교로 맺은 인연) 등으로 인한 동창회·종친회·향우회·신우회 등이 바로 패거리주의의 전형적 형태들이다. 물론 이런 모임들이 모두 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모임들이 순수하게 우정과 친목을 다지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이익이 눈앞에 보이면 적지 않은 패거리들이 자신들의 이익 관철을 위해 저돌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다른 패거리와의 경쟁이 심할수록 내부적인 결속은 더 강화되고, 배타성은 더 노골화된다. 지역사회에서도 역시 패거리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좁은 지역에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촘촘하게 엮여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연고주의의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역언론이 지역사회를 감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연고주의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의 주요사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항상 특정 인맥이 작용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저런 인연을 통해 형성된 패거리주의가 정당하게 비판할 것을 못하게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결정은 무리해서라도 꼭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학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고교 또는 대학을 나온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보여주는 패거리주의 행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또한 지역사회 내부에서 정책결정을 둘러싸고 지역 간 대립과 갈등이 생기면서 소지역주의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지역 내에서 학연을 매개로 하는 패거리주의는 때로는 소지역주의를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지역마다 나름대로 명문이라고 자처하거나 지역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학교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패거리주의의 폐단은 어떤 면에서는 중앙에서보다 더욱 심각한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제한된 자원을 둘러싸고 소수의 집단들이 다투다보니 경쟁 양상이 더 치열해지고, 그럴수록 패권을 지닌 집단의 패거리주의는 더욱 극성을 부린다. 중앙을 상대로 해서는 지역 차별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정작 지역 내부에서만큼은 자신들의 패권을 확실히 구축하며 여러 가지 차별을 제도화하고 있는 세력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결국 지역 내에서 ‘승자 독식’의 폐단이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패거리주의의 폐해를 극복하지 않는 한 우리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꿈꾸기는 어렵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면서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나라”를 염원하며, 패권적 패거리주의에 맞서 싸웠던 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패거리주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일부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손쉽게 관철시킬 수 있는 구조부터 바꾸어야 한다. 모든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만 한다. 이런 노력이 이제 지역사회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전국적인 차원에서도 기회 균등과 균형 발전을 요구하고 관철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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