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성호

자카르타 웨슬리대 대학원장

(춘천 중앙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몇 년 전 한국에 감리교신학대학교 김득중 총장께서 필자가 사역중인 자카르타 웨슬리신학대학원 박사과정에 한주간의 집중 강의를 하러 오셨다. 마침 주일날은 오래전부터 졸업생이 사역하는 교회 설교 부탁을 받았던 터라 총장님께 대신 설교를 부탁드리고 나는 통역을 하기로 했다. 그 교회는 수도 자카르타에서 100킬로 쯤 떨어진 곳이라 에어컨이 더 세게 잘 나오는 후배 교수의 차를 빌려서 세가정이 동승을 하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배터리가 방전되어 시동이 꺼지고 말았다. 오토메틱이라 밀어서 시동을 걸 수도 없었고, 차안은 금방 사우나가 되어 버리고 우리는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나가는 차들에게 손짓 몸짓하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헛수고뿐이었다. 그렇게 30분 만에 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났다. 지나가던 빨강색 승용차가 브레이크를 밟고는 후진으로 접근해 왔다. 간신히 예배시간에 맞춰 들어갈 만한 때여서 여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차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내리는 순간 모두는 놀란 입을 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를 돕겠다고 가던 길을 멈춘 사람은 60세 가량의 머리에 흰 모자ㅌ를 쓴 하지(이슬람 성지순례를 다녀온 남자)였기 때문이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차 안에서 모두는 예수께서 누가복음서(10장25-37절)에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떠올렸다. 한 유대인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소유를 빼앗기고 몸에 상처를 입었는데 유대교 제사장도 못 본체 지나가고 제사장적인 혈통을 가진 레위인도 그냥 스쳐버렸는데 당시 이방인과의 혼혈을 이유로 소외되었던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의 소유와 시간을 헌신하며 강도 만난 자를 보살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37절)고 말씀하셨다.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러 가던 중 고장 난 차에서, 마치 강도 같은 적도의 오전 태양 아래 땀과 먼지로 뒤범벅되어 난감해 하며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 할 때 세 명의 목사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푼 사람은 선한 이슬람교도였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흥미있는 사건인가?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과 테러 그리고 재해와 기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국내외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세계 7억5천만 인구가 영양실조에 있고, 매일 34,000의 어린이들이 기아와 예방이 가능했던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11억의 인구들은 깨끗한 식수를 마시지 못하고 있으며, 위생시설이 열악한 지역에서는 배설물과 곤충, 공기로 전염되는 질병으로 귀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다.

물론 종교는 인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선한 일을 행하는 도덕 이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또한 저마다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한 윤리와 도덕을 제시한다. 따라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도덕성이 회복되는 것이고 이것은 각자의 종교에 대한 기본 책임인 동시에 응답인 것이다. 오늘 세상은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웃은 우리의 돌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고, 신앙은 나에게 좀 더 넉넉한 그 무엇을 나누기를 정중히 요청하고 있다. 모든 종교인들이 각자 자기 기본에 충실 한다면 60년대 흑인가수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의 노랫말 처럼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What a wonderfu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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