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창성

서울본부 정치부국장
지난 1982년 경제학 교수 16명이 모여 다산회(茶山會)를 구성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학문과 실학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마련된 모임이었다.

강릉 출신의 조순 교수가 회장으로, 춘천 출신의 한승수 교수가 40대 소장파로 참여했다. 이들의 다산 연구는 책상머리에 머물지 않았다.

1983년 십시일반 돈을 모아 다산이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에 다산회당(茶山會堂)을 지었다. 이들은 매년 두번씩 회합을 갖고 ‘다산학’을 새롭게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자적 관료인 사대부(士大夫)로 현실정치에 참여했듯 훗날 조순 교수는 부총리와 서울시장으로, 한승수 교수는 국무총리로 다산의 ‘미완(未完)의 꿈’을 실천하고자 했다.

다산이 강진에서 저술한 여러 저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목민심서(牧民心書)다. 12편(篇) 72조(條)로 구성된 이 저서에서 선생은 공직자가 지켜야 할 덕목을 제시하고,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그 핵심 덕목이 백성들의 삶과 세상살이를 두루 살피는 ‘찰물’(察物)과 청렴을 의미하는 ‘청심’(淸心)이다. 1년 7개월여 동안의 총리직을 마감하고 29일 재야로 다시 떠난 한승수 전 총리는 다산의 목민심서를 실천하고자 한 학자이자 공직자로 평가받고 있다. 다산이 귀양지에 메인 몸으로, 목민관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인 ‘찰물’과 ‘청심’을 실천할 수 없어 심서(心書)를 저술했다면, 한 전 총리는 몸소 ‘심서’를 실천한 공직자로서 주목받고 있다.

한 전 총리는 지난해 3월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국민들은 경제를 살려 달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경제 살리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민심을 읽어낸 ‘찰물’의 소산이었다. 그는 또 “깨끗하게 내각을 이끌어 대통령을 보좌하겠다”고 다짐했다. 청렴인 ‘청심’에 대한 다짐이었다. 한 전 총리는 그리고 “공직자들은 진심으로 국민을 섬겨, 국민이 신뢰하는 공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찰물’과 ‘청심’을 주문했다. 한 전 총리는 약속대로 ‘찰물’과 ‘청심’을 실천했다. 재임 중 전국 160개 시·군을 찾아 민생을 살피며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고자 했다. 또 국무총리로서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행정 각부를 통할’하면서 국무위원 중 어느 누구도 부정부패로 국민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청심’을 구현했다.

한 전 총리는 2기 내각을 이끌 후임 총리 발표를 앞두고 지난 8월 31일 강진을 방문했다. 그는 이날 다산이 강진에 유배돼 4년간 머물렀던 사의재(四宜齋·다산 선생의 4가지 마땅히 해야 할 일)를 찾았다. 또 다산기념관에서 군수로부터 군정을 보고받고, 선생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는 다산의 숲에서 기념 촬영했다. 이어 다산유물전시관과 다산초당도 둘러 봤다. 한 전 총리는 다산회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선생이 목민관의 으뜸 덕목으로 제시한 ‘察物’과 ‘淸心’을 붓으로 직접 써 보기도 했다.

다산도 춘천을 사랑했다. 강진 유배가 끝난 후 두번 찾았다. 모두 물색이 곱고 신록이 짙어가는 봄날이었다. 1820년 음력 3월은 형 약현을 따라, 1823년 음력 4월은 맏아들 학연과 동행했다. 선생은 그해 4월 15일부터 25일까지 고향 마현에서 춘천을 오간 행적을 산수일기(汕水日記)로 남겼다. 다산은 당시 춘천의 모습을 그리며 ‘서면의 맑고 고운 모래톱이 아침 햇살에 눈부셨다’고 적었다. 선생이 춘천을 다녀간 지 113년뒤 한승수가 서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시공을 초월해 경제학자로서 한 교수는 다산 선생의 꿈을 구현하려 했고, 공직자로서 한 전 총리는 다산 선생의 미완의 꿈을 실천했다. 그의 명예로운 총리직 마감을 바라보며 떠올린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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