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효선

속초 조양감리교회 장로

(속초 밥사랑 공동체 대표)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경미한 사고로 인해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다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개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는데서 기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네티즌들은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일에 대해서도 추악한 글과 독설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음으로 내 몰기도 한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불안도 그렇고, 특히 이웃과의 사소한 분쟁과 원한 역시 당사자 간에 용서하고자 하는 너그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용서’라는 단어는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정작 내일이고 보면 “난 죽어도 용서 못해”라고 게거품을 물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지도층이나 랍비(선생)들이 용서에 관해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세 번까지는 용서해 줄 것을 가르쳤다. 이러한 관례를 알고 있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라는 시대적 관례를 깨고 파격적인 용서 관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즉 무한대로 용서 해 줄 것을 주문하셨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내용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성경 구절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 하셨다 과연 그런 용서가 가능할까? 세 번 아니라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네들이 일곱 번, 그리고 끝없이 용서 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전남 여수에 있는 애양원을 다녀왔다.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 동신을 무자비하게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받아들인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없는 손양원 목사님의 용서와 사랑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분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용서의 삶을 행함으로 보여 주심으로써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범을 우리 세대에게 보여 주셨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데 그 사랑의 증표가 바로 ‘용서’이다

지금 우리들 주변에 사랑의 증표인 용서가 점점 희미해지고 분노의 목소리가 교회에서도, 집 안에서도, 이웃에서도, 정치판에서도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여북하면 목소리 큰사람들이 이기는 세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죄악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온 인류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용서와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데 용서가 사라져 가는 지금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손양원 목사님처럼 용서하는 것이 어렵지만 작은 용서로 연습을 해 보자. 부부싸움 한 후 누구랄 것 없이 잘못 했다고 하면 손잡고 웃자.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 했다면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화해하자. 그러면 나도 행복해지고, 너도 행복해지고, 주변이 행복해지고, 예수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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