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병로

정치부장
‘서울 공화국’에 대한 염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가 살찐 돼지에서 공룡으로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애초에 질투심 따위는 갖지 않았다. 다만, ‘저렇게 커 가다가 폭발하면 어쩌나’ 하는 동화 같은 상상은 했다. 중소 도시와 사람 구경하기 힘든 시골에 살면서 느낀 그에 대한 연민. 그가 늘 안타까웠다. 웰빙과 다이어트라는 말이 광풍처럼 몰아칠 때, 우리는 그가 그 말의 참 뜻에 귀 기울이기를 바랐다. 군살을 빼고, 건강한 뜀박질을 해야 중소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편해지니까. 그러나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편애와 편식, 독선도 심해졌다. 그는 공룡의 몸집을 넘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불가사리가 돼 버렸다.

또 다른 그가 있다. 그는 거침이 없다. 하고 싶은 대로, 오로지 한 방향으로 줄달음질 친다. 그에 대한 찬사와 박수갈채도 쏟아진다. 어쩌다 서민을 생각하고, 서민과 함께하는 모습으로 각색되는 그는 가끔 눈물도 흘린다. ‘지방을 살찌우겠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왠지 공허한 메아리 같다. 저울을 선물하고 싶은 이유다.

경인년 새해. 모두가 희망을 이야기했고, 고단한 삶이 펴지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강원도 사람들은 미처 준비할 겨를도 없이 거대한 ‘세종시 쓰나미’에 휩쓸렸다. 첨복단지 등 미래 먹을거리를 빼앗긴 것도 원통한데, 이젠 미래 먹을거리를 준비할 ‘그릇’조차 사라졌다. 국가균형발전과 수도권 과밀해소라는 가치가 담겨지기를 기대했던 ‘세종시’라는 그릇은 한 순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엉뚱하게도 힘과 수의 논리로 무장한 ‘그들’은 다른 차원의 ‘세종시’를 이야기한다. 온갖 특혜와 상식을 뛰어넘는 지원책도 쏟아냈다.

그러나 강원도는 어떤가? ‘강원도 발전’을 목 놓아 외쳤던 정치리더들은 말이 없거나 에둘러 강원도의 현실을 배제한 ‘걱정’을 늘어 놓는다. 서울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들’을 향해 정곡을 찌르는, 속 시원한 말 한마디 없다. 아무도 말하려 들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선거를 염두에 둔 ‘눈치 보기’라고 진단했다. 정말 그럴까? 세종시는 도대체 강원도와 어떤 관계인가? 어떤 이는 “세종시는 비수도권지역의 ‘생존 문제’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세종시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상징적 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 강원도는 어떤 희망도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더 원통하고 분한건 강원도 사람들의 저류에 깔려 있는 무비판적 ‘안주의식’이다. 땅은 넓은데 사람은 없고, 나무와 풀만 무성한 ‘강원도’에 사는 사람들의 기막히게 빠르고 편리한 현실 안주. 물론 넋두리는 있다. 그러나 이젠 그 넋두리조차 신물이 난다. 착하고, 온순하고, 없지만 넉넉한 사람들로 묘사되는 ‘강원도 사람’이 싫어졌다. 그 싫음의 이면에는, 거대한 수도권공화국과 그 정점에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버티고 있다.

원주~강릉 복선철도와 동서고속철, 동해안 자유구역 지정 등 강원도 땅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사업들이 즐비한데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오로지 몸집 불리기에 정신없이 바쁘다. 원주 첨단의료복합단지가 무산됐을 때, 국회의정연수원 고성 유치가 슬그머니 ‘없던 일’로 마침표를 찍었을 때, 거대한 ‘그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어쩌다 이지경이 됐을까? 강원도가 ‘자기 결정권’도 갖지 못한 ‘빈 그릇’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brka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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