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해창

춘천제자교회 목사

(춘천연탄은행 대표)
흔히 세상을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 오직 일등만 있고, 부모도 우정도 사랑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것이 세상의 진면목이며 실재일까. 우리는 보이는 것만 ‘있다’고 하고,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잎이나 가지, 꽃은 없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뿌리는 항상 거기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실재’(實在)이다.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래서 없다 해도 상관없이(Independently) 거기 존재한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기에 죽은 나무에서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것이다.

사랑, 희생, 진실, 따스함, 아름다움, 영생 등은 실재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아름다운 가치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지난해 겨울은 무척 추웠다. 100년만의 폭설로 온 세상이 은빛 세상이 되었고, 10년만의 한파로 온 거리는 꽁꽁 얼어붙었다. 매일 매일 난방 걱정 물가 걱정을 하며 사는 가난한 분들에게 겨울은 더 살기 힘든 계절이다.

지난겨울 연탄은행은 장당 30%나 인상된 연탄구입비용, 1000여 가정으로 늘어난 연탄 수요자 분들에게 과연 차질 없이 연탄을 공급하여 따뜻한 겨울을 나게 해드릴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앞섰다.

그러나 그 어느 해보다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그 이유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고마운 사람, 착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렵고 괴로운 사람들 그래서 매서운 영하의 날씨에도 눈 쌓인 높은 언덕길, 좁은 골목길, 미끄러운 빙판길, 찬바람이 가슴을 파고드는 벌판길을 마다하지 않고 연탄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어 연탄은행의 겨울은 따뜻했다.

이른 새벽 연탄창고로 달려와 세상을 덥힐 연탄을 채우는 사람들, 눈길에 뒤뚱뒤뚱 거리며 연탄지게를 지고 하얀 입김을 내 품으며 언덕길을 오르는 당찬 남학생들, 하얀 얼굴에 까만 연탄재를 묻히며 마냥 천사처럼 웃으며 즐거워하는 여학생들,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한푼 두푼 모은 저금통을 들고 딸랑이며 달려오는 어린 학생들, 연탄 한 장이라도 더 빨리 추위에 고생하고 있는 어르신들께 전달하려고 재촉하는 연탄마니아들이다.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세상에 가장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욕심을 부릴 줄 모르고 비움이 곧 차오름임을 아는 사람이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넉넉한 마음과 샘물처럼 깨끗하고 연탄 방 아랫목처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다. 연탄은행을 섬기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 가장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면서 깨달은 진리 하나가 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거짓과 미움과 불의와 어둠이 판치는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망상이요, 허상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현실이 있다. 미움이 미움을 낳듯,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낳는다. 이 보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현실이다.

지난해 춘천연탄은행이 나눈 사랑의 연탄 28만장 한 장 한 장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겨울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랑이 있어 참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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