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해 창

춘천제자교회 목사

(춘천 연탄은행 대표)
오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는 정치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과 문화의 죽음이다. 대중들은 온통 부동산, 주식, 펀드, 투자 등 지엽적인 문제에만 정신이 팔려있고, 끊임없는 연예, 스포츠, 레저, 게임, 여행 등 오락거리에 몰두하고 있다. 높은 정신과 문화가 퇴보하면서 날카로운 역사의식도, 깊은 삶의 성찰도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세기에 더 이상 셰익스피어, 존 스타인벡, T. S 엘리엇, 정약용, 유영모 같은 위대한 문학가, 시인, 사상가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도무지 책을 읽지 않는 데 있다. 1426년 세종은 촉망받는 젊은 인재들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가독서(賜暇讀書)’제도를 시행하였다. “각자 맡은 직무로 인해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 본전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고 성과를 내어 내 뜻에 맞게 하라.” 일명 독서 휴가제로 관리로 등용되면 더 이상 학문에 힘쓰지 않는 풍토를 예방하고, 정사를 돌보고 가정을 꾸미랴 여념 없던 인재들에게 재충전의 시간, 즉 ‘겨를(暇)’을 주기 위함이었다. 최소 1∼3년에 이르는 사가독서 기간, 그들은 집과 고요한 산사를 오가며 자유롭게 책을 읽고 석 달 혹은 한 달에 한 번씩 읽은 내용을 정리하여 월과(月課)로 내며 학문에 전념했다. 왕은 독서에 필요한 비용은 물론 음식과 의복까지 내려 격려했으며, 성종 때에는 ‘독서당’을 지어 학문에 더욱 몰두할 수 있게 배려했다. 성삼문, 서거정, 이황, 정철, 이이, 유성룡, 이항복 등 조선을 이끈 걸출한 인물이 모두 이 제도의 수혜자로 젊은 인재들이 깊은 학식과 지혜를 쌓는 것이 곧 국가의 자신임을 간파한 선왕의 지혜가 빛을 발한 셈이다. 이후 전쟁이나 흉년 등으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사가독서제도는 340여 년간 지속되며 조선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영국에서 독서 휴가제가 있었는데,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 고위직 관료에게 3년에 한 번씩 준 ‘셰익스피어 베케이션(Shakespeare Vacation)’. 한 달 가량의 유급 휴가 동안 셰익스피어 작품 5편을 정독하여 독후감을 제출하는 것이다. 법이나 규범으로 다스려지지 않는 다양한 인간관계가 잘 묘사된 셰익스피어 작품을 통해 민중의 심리를 엿보는 통찰력을 얻고, 선정을 펴라는 여왕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다. 이 제도는 해가 지지 않는 영국 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한 근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영국인들도‘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빅토리아 폭포’ 등 곳곳에 책을 사랑한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선조들은 독서를 마음을 닦는 ‘조심(操心)’의 과정이라 했다. 단순히 지식과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양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책은 생각의 지평을 넓혀줄 뿐 아니라 깊은 내면의 세계로 인도하여 더 맑고 더 높고 더 깊고 더 넓은 인생을 살게 한다. 올 여름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을 가져보는 것은 어떤가? 무더운 여름 나무 그늘에 앉아 시원한 바람과 함께 책장을 넘기는 여유를 가져보는 게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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