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학

화천 원불교 도무
흙과 육신을 신토불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근원은 흙의 산물로 흙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지구도 한줌 한줌의 흙이 모인 큰 자원덩어리다. 여기에 깊은 바다도 높은 태산도 흙이 밑받쳐 주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생물은 선악 귀천을 막론하고 흙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헌데 만물의 영장이요 우주의 주인 격인 인간이 목마를 때 누군가가 물 한 컵을 주면 고마운 줄 잘 알면서 흙 없이는 한발짝도 옮길 수 없다는 고마움과 내 몸의 원천임을 알고 사랑하며 감사하기는 어려운가 보다. 과연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인간이 살다 죽으면 한 줌의 흙이 됨을 알면서 뭔가 절망과 허탈의 대상으로 착각하기 쉽다. 육신이 죽어 무정한 흙으로 변해 버리면 그 몸이 고맙고 두려운 것을 알기나 할까. 신토불이의 몸이 진짜의 나는 아니다. 이 몸속에 참인 나는 바로 마음이요 정신이라고 믿는다. 몸과 마음을 합해서 한 인간이라고 할 때 몸이 신토불이면 마음은 하늘과 둘 아닌 심천불이다. 인간이 철이 들면 인심 천심을 깨닫게 된다. 결국 몸은 마음이 주인이고 흙은 하늘이 주인이라는 믿음이다. 사실 흙과 몸은 유형의 무정물이지만 마음과 하늘은 무형이면서 힘과 빛과 생명의 근원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몸은 마음의 배필이고 흙은 하늘의 배필이라는 감상이다.

흙의 물질적 발달로 육신 생활에 혜택을 주는 과학 문명도 무궁하지만 마음과 정신면에 주는 혜택과 교훈도 무궁한 가운데 빙산의 일각이지만 몇 가지 살펴보며 배우려 한다.

글도 말도 없이 무정한 흙이지만 무슨 위력과 조화가 숨어 있기에 각종 초목을 종류대로 키우고 꽃피우며 열매를 맺고 번식시키는 것인가. 모든 동물에 의식주를 제공하고 농작물과 생활필수품, 전쟁 무기까지 생산해 내며 독사도 염소도 생육하고 인간을 즐겁게도 겁을 주기도 하는가.

흙은 멍청한 무정의 존재가 아니다. 현명하고 공정한 인간 생활에 있어서 종합대학과 같다.

고물로 보면 한없는 과거로부터 뭇 조상과 만물을 낳고 삼켜왔고 새롭게 보면 무궁한 현재와 미래를 이와 같이 계속 이어나가되 흙만은 생사고락과 미추를 초월해서 변함없다. 따라서 흙은 만물의 어머니요 대자대비의 부처요 만물의 고향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관용과 자비, 인욕과 공정을 배워야 한다. 이번 구제역 재난으로 수많은 소와 돼지를 살처분 한 것을 흙은 아무 불평도 없이 받아들여 품속에 안고 지, 수, 화, 풍으로 분해시켜 수용해 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가. 우리는 흙의 위력과 조화를 배우자. 흙은 국경도 종파도 이념도 종족의 차별도 없이 포용하고 세상 만물을 밑받쳐준다. 인간이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망과 허무가 아니다. 생사를 변화요 왕래로 알고 대자연속에 환향이라 생각하자.

한 예를 들자면 이 몸이 죽어 한 줌 흙에 거름이 되면 풀이 무성할 것이고 그 풀을 베어다 소를 주면 우유와 고기가 되면 사람이 먹고 산다.

이와 같이 질량 불변의 법칙에 따라 천변만화로 윤회하니 심천불이 신토불이를 깨닫고 믿으면 참의 나는 흙과 같이 하늘과 같이 영생불사로 관광이라는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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