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한호

춘천 동부교회 목사
필자가 20년 만에 돌아온 고국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필자의 전공이기도 한 기독교 복지에 관한 책을 구입하고자 종로서적을 찾는데 “이미 종로서점은 문 닫았다”며, 길에서 그 정보를 알려준 사람은 지나가던 일본인 청년이었다.

과거 몇 권 밖에 없던 기독교 복지에 관한 책은 서점에 가득하였고, 일본인을 비롯하여 다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춘천서 서울까지의 빠른 교통시스템 등 많은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변하여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산나물이다. 필자는 한국 음식이 귀한 독일에서도 살았기에 산나물 생각을 별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산나물이 입에 들어가니 그것도 고향 골짜기에서 캐내어 요리한 산나물은 외국의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햄버거와 피자에 입맛을 빼앗긴 필자의 자녀가 산나물 냄새를 맡으며 “매울 것 같다”, “이런 풀뿌리 먹어도 되냐”고 계속해서 질문을 하며 고개를 젓지만, 저에게는 여전히 고향의 맛이자 고향의 냄새였다.

얼마 전 미국에 살 때 아내가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나물을 갖고 몇 번 요리를 하였지만 이 맛이 아니었다. 분명 우리 음식문화 속에는 ‘손맛’이라는 것이 있다. 서양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요리하는 사람의 손맛이라는 개념은 말해줘도 잘 모를 것이다. 그들은 레시피(recipe)만 있으면 누구나 같은 음식 맛을 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의 음식은 레시피 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같은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요리하는 사람의 손맛이 음식 맛을 결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손맛’의 대표적인 사전적 정의는 ‘음식 만들 때 손으로 이루는 솜씨에서 우러나오는 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다 사랑과 정성의 대명사인 ‘어머니’를 결합시키면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최상급 경지에 이른다. ‘어머니 손맛’은 맛의 원초적 향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 대부분이 식탁에서 일어났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 제자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셨다. 그리고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섬겨주셨다. 심지어 자신을 배반한 제자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찾아가셔서 불을 피우고 고기와 떡을 요리하여 주셨다.

마치 이 모습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모습과도 같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울었을 것이다. 이 때 먹은 예수님의 손맛이 담긴 요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맛일 것이다. 그 고향의 맛을 생각하며 평생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을 것이다. 저 역시 어머니의 손맛에 길들여져 자녀들에게 어머니의 손맛을 신나서 이야기하듯 말이다.

예수님이 낙심한 제자들에게 찾아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듯, 장애우, 외로운 어른들, 외국인 노동자 등 우리 주변에 밤새도록 추위에 배고파하는 분들에게 찾아가 아직은 맛있는 요리를 하기에 서툴지만 어머니의 손맛을 흉내 내는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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