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오

성공회 춘천교회 관할사제·신부
“신부님, 성공회 신부님들은 결혼도 하고 술 담배도 하신다면서요?”

가끔 듣는 질문이다. 천주교 사제들은 독신으로 살고, 개신교 목사들은 술 담배를 하지 않는데, 성공회 사제들은 결혼도 하고 음주와 흡연도 하는 경우가 있느니 무엇을 절제하는지 궁금하신가 보다. 얼마 전에도 같은 질문을 받고선, 대략 이렇게 대답했다.

“무엇을 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사랑과 자유, 구원과 해방을 위한 헌신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 굳이 절제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부유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호기에 찬 후회스러운 대답이었다.

천주교 사제와 개신교의 목사들도 마찬가지로 부귀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고, 사랑과 정의를 위한 하느님의 사명을 우선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에겐 성직자의 결혼이나 술 담배의 문제가 종교생활의 중요한 문제로 보이는 것 같다.

스님들의 수도생활도 다양한 것 같다. 대부분 독신으로 사시지만 결혼을 하신 스님도 계신 줄 안다. 내가 만난 스님들은 겉모습만 보아선 기혼여부를 알 수도 없고, 대부분 먹고 마시는 데 자유로워 보였다. 무엇을 하지 않는 것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듯 해서 보기 좋았다.

그저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한 태도를 하는 것이 중요한데, ‘중용’에서는 시중(時中)이라 한다. “군자가 중용을 이룸은 군자이면서도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고,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하는 것은 그가 소인배여서 거리낌 없이 하기 때문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이 말은 때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군자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고 무엇을 해도 상관없지만, 마음대로 행동하는 소인배에겐 규칙이 제시되고 자유가 제한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 좀 더 도식적으로 해석하면 군자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고, 소인배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어떤 문장이 수천 년 동안 남아서 인류에게 빛을 비출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중용의 저 문장은 오늘날의 종교인에게 군자적인 면모를 지닌 종교인이 되라는 암시로 읽힌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정의를 실현하고, 맑고 향기로운 세계의 이상향을 현실화하기 위해 ‘큰 길’을 걸어가라는 요청으로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종교인(특히 성직자)들이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까, 겨우 듣는 질문이란 게 “결혼은 하셨는지? 술 담배는요?”하는 것이 아니었겠나.

바라건대 질문하고 대답하는 주제의 수준이 좀 달라졌으면 한다. 개인적인 자기절제의 차원을 넘어, 신의 뜻을 살피고 이타적인 역사의 문제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는가?

종교인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고 나름의 역할을 하려면, 스스로 좋은 질문을 던지고 타인에게서도 좋은 질문을 많이 받아야 한다. 늘 그렇듯 질문이 대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