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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빈 자리

성민 2011년 08월 19일 금요일
   
▲ 성 민

홍천 백락사 주지 스님
여름 텃밭이 엉망이다. 고추는 병이 와서 모조리 죽어 버렸고 감자와 옥수수 수확도 신통찮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리니 살아 있는 것들이 모두 회색빛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여름 밭의 나들이는 언제나 넉넉한데 요즘은 모든 것이 귀해졌다.

오이도 신통찮고, 상추는 녹아 내려 버렸고 지천이었던 비듬나물도 보이지를 않는다.

밥상에 올라오는 고추가 그리워 이웃에게 한줌씩 나누어주십사 부탁을 하고보니 모든 야채가격이 올랐다는데 일반인들의 식탁은 얼마나 물가에 힘들어 할까 걱정이 앞선다.

비 그치면 김장용 배추를 심어야지, 포토 준비를 마치고 밭을 갈아엎우려고 해도 땅이 마를만 하면 또 비가 오니 농사 짓는 것도 시절변화에 대처할 노력이 필요한 시점일까?

전문 농사꾼도 아닌데 배추는 잘 자라고 있다. 궂은 비가 지금은 오히려 득이 된 것일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이 보이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벌레가 먼저 시식하는 것을 알기에 우산을 쓰고서도 둘러보면서 배추밭의 가지런한 정렬이 마음밭의 열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가을이 되면 또 어떤 결과를 보일지 알 수 없으나 모든 것을 수용할 것 같은 이유는 모든 존재는 과정의 한부분이기 때문인 것 같다.

고추밭의 빈자리는 들깨 묘종으로 다 채우고 감자밭, 옥수수밭도 가을수확용 채소로 다 채워진 것을 보면 농사도 인생도 빈자리를 메우며 살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벌써 들깨 잎은 빈자리를 표나지 않게 무성하고, 웃가지 순을 베어다 부엌에 갔다드리면 공양주보살님은 행복해한다.

돌아서 보면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만족할 수 없는 인생의 흐름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자신을 돌아 볼 때 있었지만 감자도 나누고 옥수수도 나누고 안부를 물으며 살고 있으니 이 자리는 고마운 자리가 아닐까 자신을 위로해본다. 그리고 땀 흘린 만큼 주어진 세월의 흔적을 이해하는 나그네와 대화를 할 수 있을 때 이곳도 나름 소중하고 애틋한 곳이 되곤 한다.

이웃들의 새벽 노동과 배고픈 소들의 울음소리 또한 살갑다. 1만5000주의 고추를 망쳐버린 탄식 또한 시간 앞에 별 것 아니게 웃을 수 있으리라 기도드리며 우리들의 삶 또한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이웃의 수고로움이 언제 끝이 있겠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이 자신을 위한 이익으로 평가되어도 세상은 함께 굴러 가는 법. 당신이 열심히 사는 모습은 나를 감동시키고 내가 최선을 다하는 행동은 삼라만상이 지켜본다.

자신을 사랑하고 행복함으로 이웃 또한 사랑하는 법인 것을 이제 알기에 실패한 농사도 행복하고, 번거로운 축제를 벌이는 것도 행복하다.

그리고 또 비가 온다고 해도 하늘의 뜻이겠거니 겸허히 받아들겠다.

잠깐 보이는 하늘의 별들이 새삼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맑은 날, 청명함의 소중함을 간절히 느끼는 것처럼 모든 것의 고마움을 다시 새겨보며 고추 빈자리의 들깨 잎을 바라본다.

짧은 햇빛에 싱싱하게 자라주는 배추, 무들이 전하는 소식, 지금 그대가 바라보는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연의 재난 위에 상처 받은 이웃들도 결국 일어설 것이며 또 다시 씨앗을 뿌려 대지를 넉넉하게 만들 우리들이다.

오늘 고추 하나가 너무 맛있다. 그리고 감사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연과 감동을 머금고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고추 빈 자리에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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