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행 스님

월정사 부주지·새평창포럼 대표
오늘 나는 선비의 명예와 장사꾼의 명예가 구분되었으면 하고 생각해 보며 또 명예를 선택해도 굶어 죽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며 생각해 보고, 돈이 있어도 명예를 참칭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으면,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사람도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또 신분과 돈이 지배하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해본다.

명예를 네덜란드의 문화가인 하위징아(1872~1945)는 노동과는 다른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하여 ‘놀이’라 불렀고, 인간의 본질을 노동이 아닌 놀이에서 찾기 위해 ‘놀이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호모 루덴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책을 썼다.

노동하는 사람은 경제적 보상을 바라지만, 호모 루덴스는 명예를 돈과 바꾸지 않는다. 명예는 금은보화를 주고도 살 수 없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족적 풍모와 우아함, 선비만의 지조와 절개는 명예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속에서 만들어졌다가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떠내려갔다. 귀족적 우아함과 절제와 덕이 지배하던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서럽게 울고 있는 하위징아와 같은 문화보수주의자조차 급진적인 인물로 만들 만큼, 자본주의는 모든 가치를 경제용어로 변화시켰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호모 루덴스와 전혀 다른 인간형이다. 긴 호흡으로 멀리까지 내다보던 호모 루덴스와 달리, 영리추구 인간은 스피드를 사랑한다. 승자와 패자가 불분명한, 그래서 모두가 명예경쟁을 벌이던 호모 루덴스와 달리,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윤을 둘러싼 제로섬 게임을 벌인다. 그래서 경쟁에 뛰어들수록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심장은 검은 색이 되고 눈에는 핏발이 서며, 감언이설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기에 그는 쉰 목소리를 낸다.

명예의 전당은 상금을 많이 딴 선수들의 전당에 다름 아니다. 명예박사는 영리를 위해 살지 않았던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사람에게 선물하는 존경의 표시에서, 영리를 추구했던 재벌 총수가 챙기는 전리품으로 바뀐 지 오래다.

명예라는 폼 나는 지위까지 다 얻고 싶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영리추구와 양립할 수 없었던 지위까지 모두 차지하는 순간 영리추구와 양자택일의 자리에 존재하던 명예는 자본주의 승자의 전리품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명예는 승자가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되고, 승리하지 못한 자에게는 명예를 선택할 기회도 조건도 제공되지 않는다.

과거의 호모 루덴스는 신분제의 진공관 속에 갇혀 있었지만, 21세기의 호모 루덴스는 돈벌이를 추구하면서도 명예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에 산다. 21세기의 호모 루덴스가 사는 사회는 이익과 명예 사이의 양자택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돈벌이를 위해 명예를 내던질 필요가 없기에 청소부도 품위 있을 수 있고 농부도 고상할 수 있고 회사원도 우아할 수 있다면 그건 유토피아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개처럼 번 사람은 자신의 누추함을 숨기려고 명예도 돈으로 사겠다면서 개처럼 돈을 쓰기 마련이다.

누구나 정승처럼 벌 수 있는 새로운 사회, 그게 미래의 유토피아다. 하지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유토피아는 선택이 아니라 원칙이라고. 양자택일을 강제하지 않는 사회는 원칙으로서의 유토피아다. 그 유토피아 속에선 누구나 호모 루덴스가 될 수 있다. 신분사회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인간에게 선택은 텔레비전 리얼리티쇼 출연자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와 같은 사소한 것부터 모두가 호모 루덴스가 되는 사회에 도달하는 방법을 궁리하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눈을 크게 뜨면 거대한 선택이 보인다. 눈이 크든 작든, 마음의 눈은 크게 뜨는 게 좋다.

오늘 일본 간 나오토 총리와 서울시장과 교육감 등이 사퇴 또는 진실공방에 있다고 한다. 진실과 명예, 책임과 명예, 무상급식과 명예, 국민복지와 정치, 이들이 오늘 나에게 호모파버와 마더테레사와 호모 루덴스와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생각하여 구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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