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승노

화천늘사랑교회 목사
가을하면 하늘이고, 낙엽이고, 단풍이고, 국향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며칠 전 사랑하는 벗이 이메일로 글과 사진 몇 장을 보내 왔다. ‘가을 나들이’란 제목의 글에는 ‘가을빛이 너무 고와 가슴이 뻥 뚫렸다’하고, ‘가을 향기에 코가 넘치도록 흠뻑 들이 마셨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보낸 사진에는 명성산 ‘억새 언덕’의 은빛 억새풀이 우거진 광경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장관의 사진이었다. 첨언 된 글귀는 ‘은 빛 억새 짙푸른 하늘과 맞닿으면서 최고의 가을 풍경을 연출한다’고도 했다. 그 글과 사진을 보면서 나도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화천 원천리에 있는 연꽃 단지길 1㎞를 찾아 걸었다.

역시 그곳에는 여름철에 만발했던 연과 수연이 있었지만, 연은 시들어 진 채 물조리 같은 연꽃 씨만 드러내고 있었다. 속세에 물들지 않은 군자의 꽃 연, 종자가 많다하여 다산의 징표로도 삼고, 풍요와 행운과 번영과 장수와 건강과 창조력과 영원불사의 심벌로까지 상징되던 여름철 연의 그 자태는 아니었다. 세월의 힘이련가. 그래도 몇몇 수연이 꽃을 피우고 있어 다소 위로가 됐다.

연을 품고 있는 연꽃단지 주변에는 갈대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옷은 황금빛 아름다움이었지만, 꽃은 흑갈색으로 볼품이 없었다. 실은 꽃도 아니고 종자이지만. 마치 빗질도 하지 않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 밉고 밉살스럽기조차 했다. 색은 왜 이리도 칙칙한가. 그 싱싱하고 울창하던 여름의 당당함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팡세>에서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도 했고, 누군가는 ‘갈대의 순정’이라고 노래했던 그 갈대인데….

여기저기 피어 있는 억새는 같은 볏과에 속하여 있지만 그 모습이 너무도 대조되는 아름다움과 깔끔함이었다. 억새는 연약한 듯하면서 강함이었고 그 깔끔함이 세련된 신사 같았다. 몇 번이고 억새꽃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보고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몸매로 가을바람에 흐느적 거리며 석양에 흔들리는 모습은 ‘미’ 그것이었다. 꽃이 필 때는 자색이었는데 지금은 하얀 옷으로 갈아 입고 그 종자를 멀리 보내서 번성시키려는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워밍업 같기도 해서 하얀 억새꽃이 대견스럽게조차 생각되었다. 이런 것 때문에 이 무렵에 ‘민둥산 억새꽃 축제’ 등이 열리는 가보다.

이곳에는 갈대와 억새 말고도 생각나게 하는 자연정취의 그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 그 옛날 추억 속에서나 생각나는 저 푸르고 높은 하늘과, 고향 벌판을 감돌아 흐르던 ‘뒷뜨루’ 여울물이, 그리고 봄이면 피어나던 모래 밭의 하얀 삘기 꽃이 그려지며 벗들이 생각난다. 가을은 친구를 생각하는 계절인가. 그래도 이 순간만은 내 마음이 한 없이 여유로워서 좋다. 행복하다. 이것이 도심을 떠난 마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참 억새풀의 하얀 꽃을 보면서 잠언서의 말씀이 생각 난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친구의 이메일 사진과 소식에서 잊었던 가을을 찾은 것 같아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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