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기선 신부

춘천교구 양구본당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의 배신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움이 온통 묻어있는 실망의 표현입니다. 분노를 넘어선 안타까움과 연민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쳐 죽일 놈”이라고 소리치며 배신감을 표현하기보다는 “참으로 딱한 일이로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며 안타까워하시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시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원수가 나를 모욕했다면 참아 주었을 것을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맞서 왔다면 비켜나 숨었을 것을, 그러나 너였도다 내 동배, 내 동무, 내 친구, 정답게 서로 같이 사귀던 너, 축제의 모임에서 주님의 집을 함께 거닐던 너였도다.” 이 역시 친구의 배신에 대한 분노보다는 슬픔과 자괴감의 표현입니다. 나를 거슬러 뒤꿈치를 든 사람이 바로 자신의 동무였다는 사실 앞에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엾은 영혼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나타납니다. 이쯤 되면 세상 안에서 참된 우정과 믿음을 과연 찾을 수 있겠느냐는 절망감마저 느껴집니다.

우리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그러나 늘 경계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참된 친구를 사귈 수 없습니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과 함께 하고자할 때, 감동이 피어나고 우정과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모험까지도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더해져 결국 신뢰하게 되고 친구가 됩니다. 서로가 신뢰하게 되면 소중한 것까지도 공유하게 되고 떨어져 있어도 한 사람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익도 손해도 같이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우정과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며 부부가 되고 한 가족이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배반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앞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과 시편의 말씀이 우리의 슬픔을 충분히 대변해 줄 것입니다.

배반자의 삶은 어떻습니까? 배반으로 행복해졌습니까?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부모를 고발한 사람들,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친구를 이용하고 함정에 빠트리는 사람들, 형제까지도 배반하여 원수가 되는 사람들, 배은망덕하며 아주 작은 희생조차도 거절하는 사람들…. 그들이 이와 같은 일련의 행위로 진정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습니다. 배반의 대가로 얻는 것은 후회와 실망, 괴로움, 슬픔과 고독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입니다. 이를 극복하면 사도 베드로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목을 메 죽은 유다가 됩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사랑과 우정은 배신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해 보더라도 배신하지 않는 사람으로 교육받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실수하여 배신했더라도 다시 일어나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배신하지 않는 자가 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는 또 다시 쌓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에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참으로 비싼 수업료 지불하고 인생을 새롭게 배운 셈 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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