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밤엔 온 집안 곳곳에 불을 밝히고 식구들이 잠을 자지 않았다. 묵은 해 마지막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새롭게 밝아오는 새 해 첫날 아침을 경건하게 맞이하는 마음으로 '수세(守歲)'라 했다. 가고 오는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눈 부릅떠 지켜보는 선인들의 치열한 시대 정신을 엿보게하는 풍속이다. 설날 아침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설빔으로 단장하고 차례상 앞에 서면 진설한 제수들이 눈앞을 환하게 해 군침을 꿀꺽 삼켰다.

집안 어른들과 일가친척 이웃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올리고나면 주머니가 붕긋할만큼 세뱃돈이 모여 마음이 넉넉해지던 시절, 연날리기 팽이치기 썰매타기로 짧은 겨울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설날 저녁 야광귀가 집집을 돌며 아이들 신발을 훔쳐신고 가는데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는 그해 운수가 불길한 법이라 설빔으로 마련한 새 신발을 방안에 감추거나 품에 안고 자기도 했다. 체를 마루에 걸어두고 야광귀를 홀리는 재미도 있었다. 신발 훔치러 왔던 야광귀가 체 구멍을 세는데 정신을 뺐겨 신발 훔치는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첫닭 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대로 도망친다고 했다.

먼데서 오신 친척 어른들이 덕담 끝에 던져주는 칭찬도 싫지 않았다. "고놈 참 야무지게도 큰다"느니 "어찌 그리 공불 잘하냐, 느 아버진 참 좋겠다"느니 "똑똑한 맏상주를 두었으니 이 집도 한시름 놨다"느니…. 환하고 풍성하고 즐거운 일만 연달아 생기는 설 명절은 환희와 축복의 날이었다.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집안과 마을의 축제 분위기도 고향을 고향답게 만드는 요소였다. 상자일(上子日) 쥐불놀이 상묘일(上卯日) 명사(命絲)감기 상진일(上辰日) 용알뜨기 열나흗날 더위팔기 보름날 부럼깨기…. 하지만 세월이 변해도 너무 변해 이런 명절 세시풍속이 하나씩 스러지니 허전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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