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미국대사중 81년부터 86년까지 최장수 재임을 기록한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의 회고록인 '한국의 추억'을 읽다 보면 놀라게 된다. "그대에게 한 가지 청하고 싶은 말이 있네.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 보시기를 / 이별의 슬픔과 강물 두 개 중 어느 것이 더 긴지를 (請君試問東流水 / 別意與之誰長短)." 한국 친구와의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이백(李伯)의 시 한 편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한 서양인의 회고록이 한시로 정서를 드러내는 수준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그의 한국인에 대한 애정 역시 상당하다는 점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인 모윤숙씨로부터 소주 빈대떡 잡채밥 등 한국 고유음식을 대접받고 따뜻한 온돌방에서 아내와 낮잠을 즐겼다는 얘기나, 가수 패티김을 '열정과 고상함을 갖춘 사람'으로 회고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은 '전략적 정책을 펼 때 한국이 스스로 독립적인 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애정 어린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회고록이란 지난일의 감상 성찰과 함께 미래에 대한 전망 제언도 담기기 마련이다. 5년전 출간된 디트리히겐셔 독일 전 외무부장관 회고록은 그 자체가 '독일 통일 과정의 역사'였고, 작년 11월에 나온 부시 전 미국대통령 회고록은 국가원수들과의 편지를 공개했다. 대처 영국 전 총리의 회고록 역시 객관적 역사 기록으로 후대에 남을 명 회고록 중 하나로 꼽힌다.

이와달리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재임시절 정책 결정을 둘러싼 대통령으로서의 고뇌가 빠진, 최초의 전직 대통령 회고록으로서 바람직한 선례를 남기지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엄청난 정치적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3년 전에 펴낸 정주영 씨의 회고록 속의 "존경할 만한 정치인 못 만났다."는 말처럼 최근의 '회고록 충돌'은 정치인에 대한 실망을 또한번 안겨 줄 따름이다.

李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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