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개구리는 매우 가깝다. 생활로서가 아니라 정서로서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구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가령 이런 것. 어느 날 꾀 많은 개구리가 생쥐를 골려 주려고 수중경치를 구경시켜 준다며 등 위에 생쥐를 묶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숨이차다는 생쥐의 아우성을 들은 체 안하고 실컷 돌아다니다가 육지로 올라와 보니 생쥐는 이미 죽어 있더란 것이다.

개구리가 즐거워하는 한 순간 매가 내려와 잽싸게 죽은 생쥐를 덮쳐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놀란 개구리가 애걸했다. "매님, 당신이 노린 것은 생쥐가 아닙니까. 그러니 나를 풀어 주세요." 매의 대답은 "나는 생쥐도 좋아하지만 싱싱한 개구리 요리도 즐긴단다."였다나. 우리 옛 설화 속의 개구리는 대체로 꾀가 많다. 너무나 꾀가 많아 시키는 일을 거꾸로 하는 사람을 청개구리라 하지 않던가.

개구리는 이동성 유목생활에서 정착성 농경생활로의 추이 과정에서 인간들에게 사랑받게 된다. 그래서 옛 국조(國祖)의 탄생설화 속엔 개구리 얘기가 많이 끼어 든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다른 한 아버지라 할 동부여의 금와왕이 개구리 출신이고,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의 조상도 청개구리다. 엊그제가 경칩(驚蟄). 우리는 이 무렵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난다고 이해한다. 24 절기 중 하나를 개구리와 관련시키고 있으니 우리의 개구리 선호 문화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이런 개구리인데, 요즘엔 볼 수 없다. 아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개구리를 포함한 모든 양서류가 급격히 감소하고, 발견된 개구리의 상당수도 기형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꾀가 많다. 그러나 매에 잡힌 개구리모양 이제 지구 환경 재앙으로 인간들이 당할 차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올봄 한국인들은 몸에 좋다며 여전히 개구리를 잡아먹고 있다.

李光埴 논설위원 misa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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