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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의 상술

이한오 2012년 04월 06일 금요일
   
▲ 이한오

성공회 춘천교회 관할사제

일주일에 한번은 서울을 다녀온다. 춘천에서 버스나 전철로 오가는 게 쉽지만은 않았는데, 작년 청량리까지 한 시간에 가는 열차가 생겼다. ITX, 그 이름도 젊고 빠른 ‘청춘’이다.

처음엔 가격이 비싸다고 말이 많았다. 시민단체가 문제를 제기한 효과가 있었는지, 결국 개통하면서 30%를 할인하여 버스보다 싼 가격에 운행 중이다. 열차는 빠르면서도 흔들림이 적고, 화장실과 자판기, 예쁘고 상냥한 승무원까지……. 그야 말로 서울 가는 기분이 난다.

일반전철과 급행전철이 함께 있을 때, 나는 가급적 급행전철 시간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한 시간에 한 번 운행하던 급행은 나의 조급증을 그런대로 달래주었고, 가격도 일반전철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번 새로 생긴 열차를 이용하다가 다시 전철을 타려고 보니 급행전철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오랜만에 탔던 일반전철은 그날따라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깨달은 한 가지가 있으니, 내가 그동안 급행전철에 길들여져 있었고, 앞으로는 이 ITX 청춘열차에 길들여질 것이라는 거다.

자본은 에스키모인들에게 개가 끌던 썰매를 눈썰매차로 바꾸도록 한다. 처음에 공짜로 주어 익숙하게 만든 다음, 기름팔고 차를 파는 순서로 그들의 욕망과 생활패턴을 바꾸는 것이다.

나는 한 동안 경춘선 무궁화호를 추억하곤 했다. 김현철이 불렀던 ‘춘천가는 열차’를 되뇌이며 속도가 낭만을 빼앗아갔다고 개탄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놓인 고민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나는 새로 생긴 이 ITX 열차가 더 이상 할인 없이 정상가격을 받으면 어찌할지 걱정한다. 청량리까지 운임요금 8600원, 할인 2700원, 영수액 5900원인데, 어느 날 갑자기 원래운임대로 받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지, 나 자신을 시험하는 질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빠른 것을 좋아하지만 비싼 건 싫다. 그런데 더 비싸져도 열차를 계속해서 이용할 것 같은 예감이 나를 비참하게 한다. 빠른 속도와 안락함의 노예가 될 것 같아 슬프다는 말이다.

“재정난으로 이제부터 할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오”

언젠가 이처럼 공손한 말투로 안내할 텐데, 나에게 이 말은 에스키모인들에게 더 이상 휘발유를 줄 수 없으니 다시 개썰매를 타든가 알아서 하라는 말과 똑같이 들린다. 속도와 안락함에 물들게 만든 다음, 교통수단마저도 일종의 양극화로 몰아가는 것을 시장의 자유라고 주장할 것이다. 억울하면 돌 벌어 자동차 타고 다니든가!

오늘도 열차를 타고 춘천으로 오면서 ‘정치가 생활 스트레스의 원인’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몸은 편하게 빨리 왔지만 마음 한 곳은 여전히 묵직하다.

그래서 묻는다.

과연 나의 이 소심한 비참함은 빠른 속도와 안락함에 굴복하는 노예근성 때문에 오는가, 아니면 공공적인 대중교통마저 갖은 구실을 붙여 돈벌이 수단으로 만든 정부와 자본의 악랄한 상술 때문에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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