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일봉씨는 지난 88년 7월 1일 철원군 갈말읍 노인정에서 만났을 때 이미 83세의 노인이었다. 어눌해진 말투로 곰보돌 얘기를 들려주었다.

"철원엔 온통 곰보돌 밭이야. 철원 돌은 왜 그렇게 숭숭 구멍이 뚫렸는지 알아? 궁예왕이 끝까지 버티자 돌마저 그를 돌아선 거지."

태조 왕건이 궁예성을 에워쌌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는데도 궁예왕은 투항하지 않았다.

"나는 안 망한다. 저 돌에 좀이 쓸면 내가 망할까."

대노한 궁예왕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쉿, 쉿"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궐 안팎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크고 작은 돌마다 좀이 쓴 옷처럼 뻥뻥 구멍이 뚫리며 돌가루를 쏟아냈다. 그래도 왕은 꼼짝하지 않았다.

"돌 따윈 필요 없어.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세면 내가 망할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머리 하얀 까마귀 떼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때서야 궁예왕은 자신의 때가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철원벌판의 곰보돌은 그때 그렇게 얽은 것이지. 궁예왕이 살던 도성이 있는 풍천원 벌판 돌은 더 얽었어요. 그때 나타난 머리 하얀 까마귀 떼는 서해 갯벌로 날아가 갈가마귀가 됐대요. 정말 강화도에서 봤는데 갈가마귀 머리가 하얗더라고."

노인은 궁예를 반드시 '궁예왕'이라고 호칭했다.

곰보돌. 그 돌은 27만년 전 평강고원의 오리산이 토해 놓은 화산부산물이다. 철원평야는 그때 용암이 흘러가 평평하게 굳은 커다란 현무암(Basalt) 반석이다. 궁예도성이 있는 풍천원은 오리산에서 10㎞가 채 안 된다. 총 길이가 16㎞나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도성을 단 1년만에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무진장으로 뒹구는 곰보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돌마저 궁예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얘기를 만들만큼 역사는 너무 오랫동안 왕을 깔보고 있다.

갈가마귀(Jackdow)도 까마귀다. 그러나 몸길이가 33㎝밖에 안 되는 까마귀과의 소형종. 이 작은 까마귀의 특징은 목과 배가 하얗다는 것이다. 궁예도성의 서해 까마귀 떼의 출현은 서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송악, 즉 왕건파의 세력을 의미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어렸을 때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와서 바리때에 떨구었는데, 이를 집어보니 아참(牙讖)에 왕(王)자가 씌어있었으며,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궁예 몰락의 전설은 훗날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던 그 까마귀의 배신까지 끌어냄으로서 왕을 철저하게 깔아뭉개고 있다.

그러나 노인은 그 때 이런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누가 꾸며낸 얘길 뿐이지. 어떻게 돌에 좀이 쓸고,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세겠어."

노인의 말처럼 그런 황당한 전설은 무슨 비밀을 감춰두려는 장막 같았다. 종달새는 반드시 어린 새끼들이 들어있는 둥지를 향해 똑바로 내리지 않는다. 되도록 둥지서 먼 엉뚱한 풀 섶에 요란스럽게 지껄이며 내려앉아 매의 시선을 유인한다. 그리고 풀 섶을 뚫고 들어가 아주 잰걸음으로 자신의 둥지로 달려가는 것이다.

마치 종달이의 둥지 감추기처럼, 철원지방엔 건성으로 떠다니는 그런 전설의 장막 뒤편에 또 다른 궁예의 전설을 감춰두고 있다. 그 장막을 한 꺼풀만 들춰내면 철원은 10세기 동안이나 감춰뒀던 궁예 왕국을 구전으로, 유적으로 고스란히 들어 내보이고 있다. 마치 '매직아이'처럼….

이 가운데 '궁예의 최후'는 압권이다. 그 전설은 때와 장소를 밝히고 있으며, 그 장소들은 지금 한결같이 가서 만져볼 수 있는 곳들이어서 오히려 정사(正史)를 엉터리라고 비웃고 있다.

고려사는 궁예의 최후를 아주 싱겁게 기술하고 하고 있다.

'(918년 6월) 이리하여 (궁예가)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왕건)를 맞아드렸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 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먹다 바로 부양(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이 기록은 행간 곳곳에서 ‘폭정과 괴벽의 엉터리 애꾸 눈 왕을 장수나 군졸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통쾌하게 교살했다.’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미륵의 세상을 갈망하던 하층농민들이 미륵불을 돌로 쳐죽인 무지함, 백성이 왕을 쳐죽인 대역죄, 즉 자식이 어버이를 쳐죽인 패륜을 합리화하기 위해 왕의 옷을 갈아 입혀 백성이 그를 못 알아보게 했으며, 보리이삭을 훑어 먹는 거지로 만들어 더욱 그를 못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철원에 감춰져 있는 그의 최후 전설은 궁예를 아주 당당하게 묘사하고 있다.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으며, 왕은 오히려 자신의 나라를 마지막 순방하는 최후 의식을 거행한 것 같다. 왕건의 군사역모가 있던 날 밤 왕은 북문이 아니라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온 것 같다. 첫 순방지는 도성 서남쪽 중어성(中禦城). 평원 한 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외곽에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성(承陽山城)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외곽성 포천군 관인면의 보개산성(寶蓋山城 )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왕은 자신의 외곽성을 순회하는 게 틀림없었다. 왕건은 왕을 뒤쫓았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철원군 갈말읍 명성산성(鳴聲山城)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鳴聲)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의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군탄공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후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는 것을 기념해 세운 공원이다. 대통령은 그 공원에서 "다시는 나와 같은 불우한 군인이 되지 말자"는 말을 남겼다. 그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을 성공한 군인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10 세기 전 바로 그 자리에서 또 한사람의 전직 장군이 군사들과 헤어지고 있었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 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甲川)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나라 군마사육장인 '성모루성'(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오목동)을 지나고, 멀리 궁궐의 불빛을 바라보며 풍천원을 횡단해 도성의 북쪽에 와 있었다. 왕은 그 강가에서 갑옷을 벗었다. 작은 내는 그런 이유로 '갑천'이란 이름을 얻었다.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랑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육당 최남선은 그의 '풍악기유'에서 궁예는 삼방협 높은 절벽에서 투신했으며, 넘어지지 않고 우뚝 선 채로 죽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궁예의 마지막 길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철원 벌판도 "그는 부끄러움 없이 자결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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