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서예史에 있어 동해의 위치는 좀 유별난데가 있다.

과거 이 지역에 서예의 기풍이 전혀 없었다고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조선말에 이르러 그 맥이 갑자기 융성기를 맞게 된다. 마치 비를 맞은 사막이 수십 수백년간 고이 간직해 온 생명의 에너지를 한꺼번에 분출하는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조선말기에 접어들며 동해의 서예 인맥은 우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조선 후기 4대 명필의 한사람인 白下 尹淳의 맥을 이은 少南 李喜秀(1836-1909)가 말년에 동해(당시의 삼척 송정)에 터를 잡은 것이 그 계기.

한말 필명을 떨치며 영친왕을 가르쳤던 海岡 金圭鎭의 외숙이자 스승이기도 했던 少南은 영동지역에서 20여년을 지내며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 중의 으뜸이 송정 출신의 晩齋 洪樂燮(1874-1918)이다.

이후 晩齋 문하에서 桂南 沈之潢, 石齋 崔中熙, 松湖 洪鍾凡 등 명필들이 줄줄이 배출돼 晩齋는 근세 영동지역 서예를 꽃피운 시조이자 우리나라 서예사의 큰 봉우리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晩齋는 동해시 송정 태생이다. 생가는 동해항이 들어선 자리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비범해 8세때 이미 소학에 통달했으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시문을 수록한 '만재집'중 그가 12세때 지었다는 '대로(大爐)'는 그의 재능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河濱由來器 今傳萬人家 外體團團月 中心均均火'(바다 건너 중국에서 와 여러 사람의 집에 전해오는데 둥근 달속에 찬란한 불꽃이 피었구나)

晩齋는 부모에 대한 효도가 극진해 향리에서 효자로 칭송이 자자했다. 스스로 글을 배우고 익히다 12세때 文忠公 宋淵齋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3세에 이르러는 少南에게서 글씨를 배우기 시작했다.

少南은 晩齋를 가리켜 "락섭이는 특출한 눈썰미가 있어 나의 수제자 감이다"란 칭찬을 늘 입에 올렸다. 이러한 스승의 기대에 걸맞게 晩齋 또한 까다롭기로 유명한 少南의 운필묘법을 소화해냈으며 재주에 못지않은 노력으로 글쓰기에 스스로 성의를 다했다고 한다.

10여년전까지 생존해 있던 제자와 후학들에 의하면 晩齋의 해서체는 조선 500년을 통틀어 최고의 경지로 인정 받았다고 한다.

다음은 송정지역에 전하는 晩齋와 관련된 일화.

구한말 어느해 극심한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낸 주민들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 였다. 제자들뿐 아니라 그의 일필휘지를 구경하기 위해 온 동네 주민들까지 모여든 가운데 晩齋는 편액을 쓰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여 갈무리를 한 후 정좌하고 있었다. 잠시후 마음을 가다듬은 晩齋가 큰붓을 들어 단숨에 '龍'자를 쓰고 붓을 내려놓자 구경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龍자의 꼬리가 꿈틀하더니 글 전체가 움직였기 때문.

晩齋가 놀란 기색도 없이 다시 붓을 들어 이번에는 '虎'자를 쓰자 별안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더니 억수같은 비가 퍼붓기 시작, 동네 사람들은 晩齋의 '용쟁호투'란 글씨가 비를 몰고 왔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사실로 믿기에는 어려운 일이지만 오래전도 아니고 최근세를 살다간 인물에게 이같은 전설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晩齋의 '신필'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晩齋는 글씨뿐 아니라 학문에서도 출중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시문, 발문, 제문, 상량문, 비문, 행장 등이 기록된 '만재집' 2권과 '강회계록'이 있으며 '만재집'은 그가 남긴 유고를 후학들이 정리해 발간한 것.

그는 말년에 '강회계(講會契)'를 조직하고 권학을 위해 매년 2차례 정기강회를 개최했으며 강회범례를 제정해 엄한 제도 아래에서 그 전통이 계승되도록 하는 등 지역의 학풍진작에도 크게 기여했다.

흔히 서예가는 세가지 운을 타고나야 한다고 한다.

첫째 신분이 좋은 가문 출신이어야 하며, 둘째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하고, 셋째 수명이 길어야 한다는 것.

晩齋의 경우 지역의 명문대가에서 자라 세상에 둘도 없는 훌륭한 스승을 모셨지만 셋째 조건인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서예가로서 더욱 큰 업적을 후세에 남기지 못했는데 이는 강원도뿐 아니라 우리나라 서예사에 크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晩齋가 남긴 그림자는 크고도 넓다.

서울 보신각 현판을 썼고 당대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海岡 金圭鎭조차 '4대문 안에서는 내가 최고이고, 밖에서는 만재를 능가할 자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근세 서예의 거목 晩齋의 신필은 그 후학들을 통해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趙眞鎬 odyssey@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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